“이자벨. 그렇게 기분이 좋니?”
루드 의원이 늘 그렇듯이 따뜻한 목소리로 이자벨에게 묻는다.
“네. 아빠.”
활짝 웃는 이자벨의 얼굴에 루드 의원의 얼굴도 화사해진다.
불과 보름 전만 해도 병색이 완연했던 그녀의 얼굴은 이제 활짝 피어오른 유월의 장미처럼 싱그럽고 활기차기 그지없었다. 이 모든 것이 아이딘 덕택이다. 루드 의원과 이자벨의 생명을 되찾아 준 것은 물론 이렇게 이자벨에게 생기까지 불어넣어 주었다. 앞으로 영원히 갚지 못할 빚을 진 느낌이다.
오늘 휴일을 맞아 아이딘이 이자벨과 함께 피크닉을 하러 간다고 했다. 추모를 위한 휴일이고 선약도 있어 약간 망설이기도 했지만 아이딘은 이날 아니면 시간을 내기가 힘들었고 무엇보다도 실망할 이자벨을 떠올린 순간, 자신도 모르게 그냥 승낙을 하고 말았다. 사실 이날 루드 의원의 형인 칼레 위원장이 방문하기로 한 선약이 있었지만 어차피 늦은 오후가 돼서야 도착할 거라고 애써 자위했다.
사실 이자벨에 대한 관심과 걱정은 형인 칼레 위원장이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대재앙 속에 모든 가족을 잃은 칼레 위원장의 입장에서 이자벨은 단순히 조카 이상의 존재였다. 그렇기에 좀 더 그녀를 가까이에서 봤으면 하는 바람에 루드 의원을 자신이 있는 하바로프로 옮기도록 권유한 것이다.
칼레 위원장이 집에 도착했을 때 이자벨이 없으면 실망할지도 모르지만 이렇게 완쾌되고 활기찬 이자벨의 모습을 본다면 충분히 이해할 것이다.
이자벨은 벌써부터 외출 준비를 마치고 경호원들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벨소리와 함께 이자벨은 루드 의원에게 인사를 하는 듯 마는 듯 뛰쳐나갔다. 루드 의원은 그런 이자벨의 모습에 기뻐하면서도 약간의 서운함도 남았다.
‘이제 내가 아이딘이라는 친구에게 순위가 밀리는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잠시 닫혀 있는 문을 바라보다 돌아서는 순간 문밖을 나선 이자벨이 루드 의원을 깜짝 놀라게 한다. 아마 뒷문으로 들어온 모양이었다.
“아빠, 내가 그냥 나가서 서운했지?”
“아니…… 뭐…….”
루드 의원이 멋쩍어한다. 그런 루드 의원에게 이자벨이 팔을 벌려 뛰어든다. 루드 의원도 기다렸다는 듯이 이자벨을 안아 올린다. 열일곱 소녀의 무게가 그리 만만치는 않지만 루드 의원은 전혀 무거운 기색조차 없다.
“아빠, 나는 아빠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요. 그리고 두 번째가 칼레 삼촌 그리고 아이딘 오빠가 세 번째예요.”
이자벨이 루드 의원에게 얼굴을 부비며 애교를 부린다. 루드 의원의 아쉬움은 이자벨의 애교에 속절없이 사라졌다.
“아빠, 나 잘 다녀올게요!”
이자벨은 손을 흔들며 또다시 문밖으로 사라진다. 이자벨을 보낸 루드 의원은 고풍스러운 목재의자에 앉아 생각에 빠져들었다.
아내와 큰딸의 갑작스런 죽음, 그리고 작은딸 이자벨의 거식증과 실어증 그리고 불타 버린 집까지.
지난 몇 개월간은 그에게 너무나 힘든 시간이었다. 루드 의원은 이제야 비로소 안정감을 느끼고 있다. 이런 평온함을 다시는 느껴 볼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 소중하다.
문득 먼저 떠나간 아내와 딸이 그리워졌다. 루드 의원은 자신의 지갑을 꺼내 들었다. 아이딘이 친절하게도 그 지갑까지 잘 챙겨 주었기에 망정이지 지난 화재 때 하마터면 태워 버릴 뻔했다.
화재 이후 처음으로 지갑을 열어 보았다. 아내의 마지막 유품이자 마지막 가족사진이었다. 아내는 마치 죽음을 예언이라도 한 듯이 사고가 있던 전날 그 사진을 루드 의원의 지갑에 살며시 꽂아 주었다.
다정했던 아내 쥴리아를 생각하자 가슴이 저며 왔다. 가족을 위한다는 명분이었지만 늘 함께하지 못한 아쉬움에 루드 의원의 눈에 눈물이 어렸다.
그을린 비닐에 아내 쥴리아와 딸의 얼굴이 가려져 지갑에서 사진을 빼 들었다. 단란했던 가족의 모습에 눈물이 굵어졌다.
그 순간 빼어 든 사진 뒷면에 몇 개의 문자가 적혀 있는 것이 보였다. 루드 의원은 눈물을 닦으며 사진 뒷면을 응시했다.
“CHEST 30.”
쥴리아가 자신에게 전달하기 위해 써 놓은 메시지 같았다. 생각해 보니 그녀가 무엇인가 말을 하려다 머뭇거렸었던 기억이 여러 번 있었다. 혹시나 이 문자들이 아내의 죽음과 연관된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교통사고였기에 큰 의심은 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좀 더 사고에 대해 파고들 필요가 있었다. 그렇지만 이미 몇 개월이 지난 이 시점에서 한계는 있었다. 남아 있는 유일한 단서라면 이자벨이 될 것이다.
교통사고에 대해서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었다. 루드가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이자벨이 죽어 가는 엄마, 언니와 함께 하루 종일 차 안에 갇혀 있다 구조되었다는 사실 하나였다.
이제 겨우 안정을 찾은 이자벨에게 그때의 기억을 다시 되새길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모른 척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었다. 이런저런 생각에 서서히 눈이 감겨 오기 시작했다.
모처럼의 휴일. 루드 의원은 오랜만에 평온한 낮잠에 빠져들었다.
* * *
미하일 중위는 오늘 비번임에도 불구하고 경호업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출근을 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뭐 스트레스를 크게 받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 경비대 업무라는 것이 그렇게 힘들거나 고된 일은 아니다. 대재앙 이전의 경찰관, 소방관, 군인의 업무를 모두 맡고 있긴 하지만 업무의 강도는 현저히 떨어져 여러 행정업무나 하면서 하루하루 소일하는 것이 일상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단지 최근에 이상한 괴물들의 출현이나 루드 의원의 테러 같은 굵직굵직한 사건이 연이어 터졌지만 그런 일은 어쩌다 한 번씩 있는 일이었고 오히려 그런 일들이 나름의 긴장감으로 무료한 생활을 달래 주는 듯했다.
미하일 중위는 좀 더 재미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사실 대재앙 이후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한정되기는 했지만 미하일은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되고 싶었다. 게다가 그림 실력도 뛰어난 편이었다. 그렇지만 군에 있었던 아버지의 강요-이 시대 대부분의 남자들은 이곳에 가긴 하지만-로 컴뱃 아카데미에 들어가고, 컴뱃 아카데미에 들어온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군문에 입문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컴뱃 아카데미에서 미하일의 중간 정도 성적으로는 자신의 진로를 마음대로 선택할 수는 없었다-물론 아버지의 후광을 배재하고-. 많은 사람들이 선망하는 중앙군에 가려면 예사로운 성적으로는 어림도 없었기 때문이다.
미하일의 성적으로는 하바로프의 연방군까지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연방군이나 경비대나 그게 그거 아닐까라고 생각해서 경비대를 지원했는데 막상 상황은 달라졌다. 루체 왕국과의 전쟁이 벌어지면서 연방군이 전투에 투입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전까지 연방군은 지역 예비군의 성격이었는데 상비군으로서의 전환이 이루어진 것이다. 게다가 하바로프 연방군은 그 어느 연방군보다 실전 경험이 풍부했고 루체 왕국과 국경을 접했기 때문에 전선의 최전방에 서게 되었다.
하바로프 연방군이 실전에 강한 이유는 연방 결성 이전까지 국경을 인접한 연방국인 페트라와 쉴 새 없이 전쟁을 벌여 왔기 때문이다. 그 원인은 두 지역 경계선에 있는 곡창지대 때문이었는데 식량이 부족한 두 지역으로서는 생존을 위해 어찌 보면 필연적인 것일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닉스 연방이 결성되면서 네바다 같은 곡창지역에서 수송한 식량으로 식량난이 해결되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두 연방국이 일찍이 싸우다 망했을 거라는 말들이 있을 정도였다.
이렇게 페트라와 끊임없는 분쟁으로 단련된 하바로프 연방군은 실전에 있어 가장 강한 연방군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런 연유로 연방 통일 후 중앙군 1대 사령관을 하바로프 출신의 랄프 프린츠 사령관이 맡게 되자 하바로프 연방군의 자부심은 남들과 달랐다.
더욱이 최근에는 하바로프 연방군의 지휘권이 중앙군 남부사령부로 넘어가면서 하바로프 연방의 위치와 처우가 중앙군과 거의 동일해지면서 하바로프 연방군의 사기는 더욱 하늘을 찌를 듯 높아졌다.
미하일 중위는 이럴 줄 알았으면 경비대보다 하바로프 연방군이라도 지원을 했던 게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며칠 전 퍼플 하스피탈에서 만난 연방군에서 복무하는 컴뱃 아카데미 동기의 거들먹거림만 보지 않았어도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을지도 모르긴 하지만 말이다.
고작 뜀박질 잘한다고 컴뱃 아카데미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었는지 모르지만 작전, 정보 수집 같은 작전 운영 평가에서는 자신의 절반도 안 되는 점수를 받았던 녀석이 자신이 그나마 군에서 해 보고 싶었던 작전을 입안하는 작전 참모라는 사실에 배알이 뒤틀린 것도 사실이었다.
게다가 벌써 자신보다 두 계급이나 높은 소령 계급장을 달았다는 사실에 뜨악했다. 그런 머저리 같은 녀석이 인정받는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더욱이 자신이 죽어서 이 계급 특진을 하기 전까지는 그를 절대 넘어설 수 없다는 좌절감이 미하일 중위를 더욱 우울하게 만들었다.
그나마 한 가지 위안이 되는 것은 하바로프 경비대의 복장이 중앙군이나 연방군의 복장보다 훨씬 멋있다는 것이다.
숲과 자연을 상징하는 짙은 초록색과 변함없는 달을 상징하는 짙은 노란색을 적절히 혼합한 세련된 이미지 그리고 왼쪽 가슴 부분에 두툼한 금속으로 만들어진 멋들어진 흉장은 다른 연방의 군복에 비교할 바가 아니다. 여자를 꾀기 위해 만들어진 최고의 군복이라는 평가를 받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만큼 하바로프의 군복은 세련되고 멋있다. 미하일이 경비대에 지원한 가장 큰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특히 진흙 포대로까지 불리는 중앙군의 군복에 비한다면 하바로프의 군복은 더욱 빛이 난다. 미하일 중위는 그런 없어 보이는 포대 같은 디자인의 군복을 입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
이런 생각이 들자 약간은 처졌던 기분이 다시금 좋아졌다. 게다가 훈련이다 작전이다 매번 쉴 틈 없이 뛰어다니는 연방군의 일상을 떠올리면 일과 후 아가씨들과 신나게 한잔할 수 있는 이곳 경비대의 생활이 훨씬 유익하고 보람차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오늘 경비대의 경호 업무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다. 칼레 위원장의 경호와 루드 의원의 딸 이자벨의 경호였다. 경호 대상이 둘이다 보니 인원이 좀 더 필요한 듯싶었다.
모두가 어차피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군인들의 경우 술도 먹지 못하는 반쪽짜리 공휴일인 만큼 이럴 바에는 일하는 것이 훨씬 좋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미하일 중위는 선택의 여지도 없이 루드 의원의 딸 이자벨의 경호를 맡기로 했다. 당연한 선택이었다. 무게 잡고 정부 요인을 쫓아다닐 바에야 설렁설렁 이자벨의 꽁무니만 따라다니는 편이 누가 보더라도 훨씬 편할 테니 말이다.
게다가 이번에는 하바로프의 최고 권력자인 칼레 위원장이 오는 만큼 이 지역 출신에 보기 싫은 꼰대들도 대거 참석하는 것 같다. 지역 유지나 퇴역한 장교들은 위원장에게 줄이라도 한번 서 볼까 해서 벌써부터 들썩들썩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꼴들을 지켜보면서 무게 잡고 있을 바에야 이자벨의 경호가 훨씬 편할 것 같다. 피크닉을 간다니 뭐 나름대로 또 다른 재미도 있을 것 같고, 아이딘이라는 재미있는 친구도 함께 간다고 생각하니 미하일 중위에게도 오늘은 무척 재미있는 하루가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 *
아이딘 일행이 소풍을 나온 곳은 하바로프 북서부쪽 숲이었다. 목재 산지인 하바로프의 특징을 대변하듯이 넓은 숲과 들판, 그리고 초원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닉스 연방의 수도 헤이번과 연결된 수도고속화도로의 종착지와 그리 멀지 않은 곳이기도 했다.
잭슨이 이전부터 자주 놀러온 곳이라고 해서 이곳을 선정했는데 울창한 숲과 들판에 핀 꽃까지 잘 어우러져 피크닉하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노만 마을과는 꽤 되는 거리였지만 이전처럼 아이딘의 사촌형 란돌 대장의 지나침을 넘어서는 배려로 차량 두 대까지 지원받아 이곳에 오는 것으로 했다.
약간 아쉬웠던 것은 당초 함께하기로 했던 페이가 급한 심장병 환자가 있어 어쩔 수 없이 빠지게 되었다. 모처럼 페이와 함께 하려고 했던 예리엘이 조금 실망한 눈치였지만 아주 심각한 심장병 환자라는 페이의 설명에 예리엘도 마음을 접었다. 그리고 페이의 몫까지 신나게 놀기로 했다. 모처럼의 외출을 위해 한껏 빼어 입은 페이의 모습에 약간 미안한 마음도 들었지만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이건 다 뭐야?”
예리엘이 직접 준비한 피크닉 박스에서 다양한 음식물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온다. 샌드위치에 빵, 과자, 과일 등 엄청난 양이다. 출발할 때부터 한참을 미적미적했던 것이 아마 이 때문인 것 같았다.
“예리엘, 이걸 누가 다 먹어?”
아이딘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예리엘을 바라본다. 예리엘의 식탐은 일찍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까지일 줄은 몰랐다.
아이딘과 예리엘, 두 덩치, 이자벨, 미쉘, 그리고 경호원 6명을 포함해도 12명밖에 안 되는 인원인데 아직 트렁크에서 미처 다 꺼내지 못한 음식까지 본다면 얼핏 봐도 50인분은 되지 않을까 싶었다.
“뭔 걱정이야. 그냥 천천히 먹으면 되지.”
그렇게 말하며 예리엘이 배시시 웃는다. 모처럼 밀짚모자와 너울거리는 하늘색 린넨 원피스로 한껏 차려입은 날씬한 몸매의 예리엘과 그 수많은 음식과는 도통 매칭이 되지 않는 상황이다.
생각해 보니 저 엄청난 식탐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저렇게 늘씬한 몸매를 가졌는지는 정말 미스터리 중의 미스터리다.
미하일 중위는 주변에 활짝 핀 꽃들과 대조적으로 출발 이후부터 내내 우거지상이었다. 자신이 최상급자이고 아이딘과의 친분도 있어 좀 편하고 재미있게 경호를 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전혀 예상 밖의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이자벨의 경호를 위해 중앙군에서 별도의 경호 인력을 추가로 보내 온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경호책임자의 계급은 자기보다 높은 대위. 원래 연방군이 중앙군의 명령을 따를 필요는 없지만 지난해 하바로프 연방군을 필두로 베르시와 모스크의 연방군이 각각 중앙군의 남부 사령부와 북부 사령부 휘하로 편입되면서 명령체계가 일원화된 것이 얼마 전 일이었다.
약간 예외적인 사항이긴 하지만 경비대 또한 그런 맥락 하에 중앙군의 명령체계를 따를 수밖에 없게 되었다. 게다가 미하일 중위가 더욱 기분 나빴던 것은 바로 내일이 자신의 대위 정기 진급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불과 하루 차이로 인한 계급 차였기에 한층 기분이 뒤틀린 상황이었다.
강성욱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