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그거 알아? 미하일 중위 훈장도 받는데…….”
“그러면 뭐 해. 죽은 다음에 그래 봤자 무슨 소용이야. 미하일 중위만 아깝지.”
“모든 게 덜떨어진 경비대 윗대가리 녀석들 때문이지 뭐.”
그때 한 부류의 경비대원들이 몰려왔다. 잭슨과 호퍼는 그들이 자신들의 대화를 엿들었을까 바짝 긴장했지만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았다.
경비대원들이 공손히 예리엘을 찾았다. 그리고는 경비대원 하나가 조심스럽게 품안에 있던 포장 하나를 꺼내 예리엘 앞에 풀었다.
“미하일 중령의 유품입니다. 미하일 중령이 매번 여기에 맡겼다고 해서요. 마지막으로 손봐 주셨으면 해서요.”
예리엘은 미하일 중위의 유품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미처 닦이지 않은 핏자국들이 그날의 처절한 기억을 되살아나게 했다. 침착했던 미하일 중위가 아니었다면 자신도 큰 화를 입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 한구석이 조금은 뭉클해졌다. 그리고 총을 자세히 보기 위해 집어 드는 순간이었다.
“이 총이…….”
예리엘의 음성이 떨리기 시작했다.
“이 총이 정말 미하일 중위님의 총인가요?”
“네. 맞습니다. 미하일 프린츠 중위, 아니 미하일 프린츠 중령이 항상 갖고 다니시던 총입니다. 미하일 중령의 아버지이신 랄프 장군님이 직접 확인하셨습니다.”
“총에 무슨 문제라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미하일 중위의 권총은 지난 3년간 예리엘이 거의 매주 손을 봐 왔던 콜트45였다. 매번 자신의 총도 못 닦는 형편없고 덜떨어진 경비대 장교의 장식품이라고 비꼬았던 바로 그 총의 주인이 미하일 중위일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그 총은 아시다시피 닉스 연방의 국보입니다. 공화국 최초의 사령관 랄프 프린츠 장군도 그 총을 쓰셨습니다. 그 총은 프린츠 가문의 상징이기도 하고요. 2차 세계대전 때 일본과의 정전 협정장에 반입된 권총 중 하나로서 ‘피스메이커’로 불리는 의미 있는 권총입니다.”
“아…… 그랬군요.”
당황스러워하는 예리엘의 대답에 경비대원이 의아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이 총이 닉스 연방 통일 협정장에 프린츠 장군이 차고 들어가신 것도 모르시겠네요. ‘피스메이커’란 애칭에 대한 유래도?”
예리엘도 예전에 들어 본 적은 있었다. 닉스 연방의 아홉 개 국가가 서로 간의 전쟁을 끝내고 연방으로 통일되는 시점에 아홉 명의 군사 지도자들이 그 자리에서 자신의 권총을 풀어 닉스 연방의 평화의 상징으로 삼았다는 이야기를.
“네…… 잘은 몰랐어요.”
“아. 그러셨군요. 그 총을 손질하는 건스미스들은 그 총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로 해당지역에 한해 닉스 연방의 모든 군사조직에 대한 모든 총기 관리에 대한 권한을 부여받게 됩니다. 단 본인이 원하실 경우에 한하긴 합니다.”
예리엘은 머리에 충격을 받은 것처럼 머리가 띵했다.
“그럼 혹시 제가 경비대의 총기들을 계속 손질한 것도…… 그거랑 관계있나요?”
“네. 그렇습니다. 예리엘 글라이스너 양께서는 루디안 지역 경비대에 있는 중화기에 대한 총기 관리권을 신청하신 걸로 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그런 총에 그런 규칙이 있었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네, 흔한 일은 아닙니다. 닉스 연방에서 그런 대우를 받는 총과 건스미스가 고작해야 아홉 명뿐이니까요.”
“그럼 저는 앞으로…….”
“네. 일단 이 총의 소유권은 미하일 중령의 아버지이신 랄프 사령관님에게 넘어갔습니다. 그리고 미하일 중령님이 3년씩이나 이곳에 총의 손질을 맡긴 이유가 있을 테니 예리엘 글라이스너 양에게 계속 총기관리 권한을 부여토록 요청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게 그 문서입니다. 총기의 소유자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사인만 해 주시면 됩니다.”
경비대원이 문서 하나를 예리엘 앞에 내밀었다.
예리엘은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네바다에서 오빠를 잃은 충격으로 페이와 함께 이곳 연고도 없는 하바로프로 와서 적지 않은 고생을 했다. 실력도 변변치 않고 연고도 없는 그녀가 자리를 잡는 데 경비대의 총기 관리 업무는 영업을 확장하거나 금전적으로나 큰 도움이 되었다.
그 뒤에 미하일 중위의 배려가 있었다는 것은 꿈에도 몰랐다. 그리고 이런 일방적인 통보는 너무하다 싶었다.
그때 다른 경비대원 하나가 슬며시 뭔가를 내민다. 돌돌 말려 있는 것이 분명 그림 같았다.
“이건 제가 드릴까 말까 고민하다가 드리는 것입니다. 미하일 중위, 아니 중령님의 유품입니다. 그냥 예리엘 글라이스너 양께 드리는 것이 합당할 것 같아 미하일 중령님의 유품에서 제가 임의로 뺐습니다.”
“저기 문서에 사인은…….”
“제가 너무 경황이 없어서 지금은 좀…… 나중에 생각해도 될까요?”
“네, 네. 괜찮습니다.”
“내일 다시 찾아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총기만 내일 오전 일찍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런데 경비대 양반. 왜 미하일 중위가 중령이 된 거야?”
참견쟁이 잭슨이 끝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경비대원에게 물어본다.
“그건…… 사실 이례적이긴 한데 어제가 미하일 중령님이 원래는 대위로 승진하는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자로 전사 처리가 되셔서 2계급 특진이 추서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례적으로 3계급을 승진하신 게 되었습니다. 경비대로서는 전무후무한 일입니다.”
호퍼와 잭슨이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미하일 중령님은 경비대원으로서 최초로 제국 최고 무공훈장인 프린츠 훈장도 수여받으셨습니다. 하바로프 연방군에서 단 2명, 닉스 중앙군에서도 5명밖에 받지 못한 프린츠 훈장을 말입니다. 정말 존경스런 분입니다. 저희 경비대원들의 입장에서는 진정한 영웅이시라고밖에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경비대원은 묻지도 않은 사실까지 감정에 북받치는 떨리는 목소리로 설명했다. 경비대원들의 모습에서 미하일 중위에 대한 강한 존경과 자부심이 절로 묻어 나왔다.
경비대원이 경례를 하고 자리를 떠나고 나서야 꼼짝도 않고 있던 예리엘의 마음이 가까스로 진정이 된 듯싶었다. 예리엘의 눈은 미하일 중위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으로 만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울어 버릴 듯이 그녀의 큰 두 눈에 눈물이 가득 찼다.
눈치 없는 호퍼가 말했다.
“예리엘, 이거 뭔지 풀어 볼까?”
예리엘이 미처 말을 꺼내기도 전에 호퍼가 경비대원이 주고 간 물건을 풀어헤쳤다. 그림이었다. 예리엘이 해맑게 웃으며 중기관총을 수리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어라, 이거 예리엘이네. 정말 똑같이 생겼어! 미하일 중위가 그린 건가?”
예리엘은 그림 속 자신의 모습을 보고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눈물을 터뜨렸다. 미하일 중위의 얼굴도 모습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왠지 그에 대한 미안한 감정이 솟아오를 뿐이다.
예리엘은 돌연 미하일의 권총을 가지고는 자신의 방으로 울면서 뛰어 들어갔다. 잭슨과 호퍼 두 덩치는 예리엘의 그림을 들고 한참을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 * *
경비대장 란돌 중령에게 있어 재수 없는 날의 연속이다.
경비대장 란돌 중령. 사실 그는 대령이 되어 있어야 했다. 그리고 오늘 승진 기념 축하파티를 열고 있어야 했다. 그렇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지금 란돌 중령에게 보이는 것은 자신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는 많은 사람들이 아닌 하바로프의 거친 수풀과 무성한 나무뿐이었다. 그는 꿈에도 자신이 이렇게 하바로프의 숲을 헤치고 다닐 줄은 몰랐다.
이 초원과 숲을 미친 늑대처럼 헤매고 다닌 게 벌써 이틀째다. 게다가 자신의 사촌 동생이 되어 버린 빨간 머리 녀석뿐만 아니라 자신의 직속 부하인 미하일 중위 역시 맘에 들지 않았다. 반란군의 추격이 있긴 하지만 마치 이 엄청난 숲 전체를 끝도 없이 누비고 다닐 기세다. 다 죽어 가는 것을 기껏 살려 줬더니 배은망덕도 유분수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게다가 말도 안 되게 무거운 무전기까지 자기가 메고 있는 것이 못마땅했다. 저 빨간 머리에게 시키려 했지만 군사작전에 민간인의 개입은 안 된다는 미하일 중위의 말 같지도 않은 소리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미하일의 아버지가 누구란 것만 몰랐어도 경비대장 란돌 중령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옆에는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는 페이까지 있다 보니 어쩔 수가 없었다. 부대에 복귀하면 미하일 중위를 아주 요절을 낼 생각이었다.
경비대장 란돌 중령은 행정장교 출신으로 이렇게 30대 후반?39세지만?에 대령이 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자신이 부정한 장교다, 뇌물을 받는다 말도 많지만 자신은 결코 양심과 법에 위배되는 일은 한 적이 없다. 돈을 법적인 문제가 생기지 않는 한 최대한 늦게 주거나-이자 차익은 챙겼지만- 조금 편법을 사용하는 사업자-결단코 불법 사업자는 아닌?들 간의 편법-결코 불법이 아닌- 거래로 많은 돈을 모은 것 또한 사실이다. 그렇지만 경비대 장교로서 명예롭지 않거나 문제가 되는 행동은 결코 한 번도 한 적이?자신의 기준으로?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자신의 나쁜 짓에 대해서는 그 어떠한 물증도 없는 명예로운 군인이었다. 이제 승진만 하면 상황에 따라 연방군이나 중앙군에 발령이 날 게 뻔했는데 시작부터 왠지 꼬이는-경비대는 그 한계상 중령 계급이 최고 계급, 대령 승진이 된 후 1년 안에 연방군이나 중앙군의 대령으로 옮겨가는 것이 관례- 기분이다.
커다란 나무 밑에 아이딘과 미하일이 잠시 몸을 기대고 있었다. 경비대장 란돌은 뭐가 불만인지 저만큼 앞에 떨어져 투덜거리며 혹시나 반란군이 따라붙었을까 몸을 바짝 낮춘 채 경계 중이다.
페이는 고된 여정에 너무나 지쳤는지 이미 눈을 감고 있었다. 여자의 몸으로 이틀간의 강행군은 무리였다. 워낙 활달한 성격의 페이이지만 어제부터는 말수가 확연히 줄어들었다.
“언제쯤 루디안에 복귀할 수 있을까요?”
“어, 특별한 일이 없으면 내일 오전이면 되지 않을까?”
“눈은 어떠세요?”
아이딘이 걱정스럽다는 듯이 미하일 중위의 상처를 바라본다.
“괜찮아. 그렇게 불편하진 않은 거 같아.”
미하일 중위가 씩씩하게 말한다.
“그런데 미하일 중위님. 왜 저 녀석들이 저렇게 집요하게 우릴 추적하는 건가요?”
“아니 그게 뭐…… 뭐라고 딱 상황을 정리하기 힘든데.”
“혹시 저기 란돌 대장님이 멘 무전기 때문 아닐까요?”
“어…… 저게 모양은 좀 후줄근해도 반란군 녀석들에게는 꽤나 중요한 물건인 것은 분명한 것 같아.”
“그렇군요. 그런데 미하일 중위님은 어떻게 그렇게 상황판단을 잘하세요?”
“뭘?”
“반란군 습격 때도 그렇고 반란군의 추격도 잘 따돌리셨잖아요. 정말 대단하세요.”
“아…… 그게 그냥 그렇지 뭐…….”
뜬금없는 아이딘의 칭찬에 미하일이 머리를 긁적인다.
“오히려 나는 전혀 지치지도 않는 네가 마치 슈퍼맨같이 느껴져.”
“아, 그게…… 저도 그냥 그렇지요.”
미하일이 먼저 웃음을 터트린다. 아이딘도 큰 소리로 따라 웃는다.
“하하하!”
둘의 웃음소리에 란돌 대장이 조용히 하라고 화를 버럭 낸다. 그렇게 떠들면 적들이 다 듣는다며 워낙 큰 소리로 화를 내는 바람에 피곤함에 잠시 눈을 감은 페이가 눈이 번쩍 뜨일 정도였다.
* * *
미하일 중위가 총에 맞아 쓰러지고 아이딘은 정신이 없었다. 날아오는 총알을 피해 우선 바닥에 엎드렸다. 미하일 중위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할 겨를도 없었다.
잠시 총성이 잦아든 틈을 타 그냥 무작정 미하일 중위를 들쳐 업고 뛸 수밖에 없었다. 적들이 도망치는 아이딘을 따라 차를 타고 추격해 보지만 숲으로 뛰어 들어가는 아이딘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아이딘은 최대한 적들과 멀어지기 위해 한참을 쉬지 않고 뛰었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충분히 적들과 거리를 벌렸다고 생각했을 때, 아이딘은 깜짝 놀라며 멈추어 섰다. 페이와 란돌 대장이 눈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놀라기는 페이와 란돌 대장 역시 매한가지였다. 서로가 자초지종을 물어볼 경황도 없었다. 아이딘은 미하일 중위를 바닥에 눕히고 의사인 페이에게 상처를 어서 봐 달라고 할 뿐이다.
“어떻게 된 거야, 아이딘?”
페이가 미하일 중위의 윗옷을 풀어 헤치며 맥박을 확인한다.
“아니 그게…… 반란군인가? 저희를 습격했어요. 그리고 미하일 중위가 총에 맞았어요.”
“반란군이라고?”
반란군이라는 말에 경비대장 란돌이 화들짝 놀란다.
“알았어. 우선 눈의 상처를 봐야겠는데…… 이런, 오른쪽 안구 부위 뼈가 다 날아갔네. 안구 쪽도 그렇고. 깨끗한 관통이라 총알은 뺄 필요도 없고 상처도 이미 자연 지혈되어 위험한 상황은 넘겼어. 그래도 빨리 병원에 가야겠는데. 감염될 위험도 있으니. 그리고 다른 데는 뭐 큰 건 아니야. 이 정도로 끝난 게 정말 다행이야.”
“그럼 다른 곳은 괜찮은 건가요?”
“어…… 여기 갈비뼈가 두 개는 부러진 거 같은데 이거 꽤나 아프겠는데.”
페이가 미하일 중위의 가슴을 매만진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겠지만 눈 한쪽이 완전히 날아가 버렸네. 이런 꽤나 잘생긴 얼굴인데…… 아가씨들이 많이 아쉬워하겠는데.”
“그나마 다행이네요.”
“그렇지 뭐. 죽지는 않을 테니…….”
“휴…….”
아이딘은 그제야 안심이 되는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란돌 대장님…… 저희 어서 돌아가야 할 거 같은데요? 여기 이 친구 빨리 병원에 가는 게 좋겠어요.”
페이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옆에서 말없이 지켜보던 란돌 대장에게 말한다.
란돌 대장은 뚱한 표정이다. 페이와 모처럼의 의미 있는 데이트가 제대로 시작하기도 전에 이렇게 산산조각이 나 버렸기 때문이다.
강성욱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