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민은 천천히 손을 뻗어 술병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입으로 가져가 마시기 시작했다.
“드시면서 들으세요. 지금 오라버니께서 하실 수 있는 방법은 모두 세 가지가 있어요. 첫 번째 다 떨쳐버리고 원래 계획대로 활동한다. 직접적으로 밝힐 수는 없지만 오라버니의 그 억울함은 어느 정도나마 풀 수 있을 거예요. 두 번째, 그냥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무림서생으로 활동하시는 거죠. 활동하시면서 자신은 절대 그런 적이 없다고 결백함을 밝히는 겁니다. 정파와 사파 측에서 방해를 하겠지만 그 소문을 내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 비선에서 전담을 하겠어요. 마지막으로 세 번째, 오라버니의 행보를 여기서 멈추는 겁니다. 여기서 멈추고 궁으로 돌아가셔서 후임자를 지정하신 후 그 후임자에게 오라버니의 일을 맡기는 겁니다.”
태민은 술을 마시던 동작을 멈추고 아린을 바라보았다.
“세 번째는 못 들은 것으로 하겠어. 그렇게 하면 내 이 억울함이 풀릴 것 같지가 않거든. 뭐 궁으로 복귀하고 다음 대 궁주의 자리를 받은 후 복수해도 되지만 여기서 이렇게 포기하면 나를 눈엣가시로 여기는 이들이 이때가 기회다 하고 승냥이처럼 달려들 거야. 그리고 그렇게 되면 너무 많은 피를 흘리게 돼. 어차피 세력 싸움에 들어가면 불가피하겠지만 내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그러는 건 싫어.”
태민의 눈이 번뜩였다. 그것을 놓치지 않은 아린은 순간적으로 몸을 움츠렸지만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으로 말했다.
“그럼 어떻게 하시겠어요. 첫 번째나 두 번째 방법 중에서 선택하셔야 할 것 같은데…….”
“차라리 둘 다 가자. 일단 무림서생으로 찾아가서 놈들을 상대하다가 내 정체를 밝히면 되겠지. 그럼 아마 놈들의 반응이 달라질 거야. 그렇게 되면 봉문을 당하든지 멸문을 당하든지 알아서 선택하겠지. 어차피 악소문 날 거 제대로 나게 해볼 거야. 그리고 놈들에게 나라는 놈을 잘못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톡톡히 알려주겠어!”
“오라버니, 지금 그 말씀은 정사 구분 없이 걸리면 처리한다는 말씀이신가요?”
태민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아린은 예정된 계획의 상당수를 변경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원래 궁에서는 안 좋은 소문이 나는 시기에 맞춰서 태민이 무림서생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마궁의 소궁주로 활동하게 하여 이목을 돌리고 그 사이 궁에서는 마도문파를 통합하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이렇게 되어버리면 포섭하는 방법을 바꿔야 했다. 게다가 그녀가 담당하는 기관은 지금보다 더욱 바빠질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뭐 그렇게 결심하셨다니 다행이네요. 뭐 이러니 저러니 해도 원래 계획에서 많이 벗어나지는 않으니까요. 솔직히 좀 걱정됐거든요. 지금까지 마도 쪽에서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어서 정과 사 양측에서 의심을 하고 있거든요. 정사 양측을 상대하기로 하셨으니 사파 쪽의 문파도 정리를 해오라고 해야겠네요.”
아린은 살며시 웃으며 고개를 돌려 벽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나와 소궁주님이 하는 소리를 다 들었지?”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벽에서 한 남자가 튀어나왔다. 그는 마치 처음부터 모든 대화를 듣고 있었다는 얼굴로 부복하고 앉았다.
“예, 다 들었습니다. 지금 곧 복귀를 하여 소궁주님과 선주님의 말씀을 궁주님과 장로님들 그리고 비선에 그대로 전달하겠습니다. 그동안 소궁주님께서는 선주님이 가지고 계신 목록에 있는 문파들을 차례대로 정리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선주님, 여기서 시작을 하시게 되면 어느 문파를 먼저 치실 생각이신지요. 그 순서를 보고 두 분과 합류할 지점을 제가 알아야 하기에…….”
“가는 동안 이런저런 자잘한 문파를 치겠지만 지금의 목적지는 남악이야. 오악검파 중 남악인 형산파를 칠 생각이야.”
“그럼 14번으로 가실 생각이시군요. 알겠습니다.”
아린은 자신의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그에게 건네주었고 그는 그것을 받자마자 바로 자리를 떴다.
그가 사라지고 아린은 고개를 돌려 태민을 바라보았다.
“오라버니. 어떻게 하시겠어요? 지금 바로 형산파로 가시겠어요? 아니면…….”
“그런 악소문을 내는데 형산파도 일조를 했나?”
“형산파는 정파로 정파 놈들의 연합체인 정무련 소속이니 당연히 했겠죠. 설사 일조를 안 했다고 하더라도 그런 악소문을 내는 곳의 주체가 정파의 연합 정무련과 사파의 연합 전사맹이니까요. 둘 중 하나에 소속이 되어 있으면 한 것이 되겠죠. 심심하면 공동책임 타령도 하는 놈들이니…….”
“그럼 가자. 먼저 형산파를 상대한다. 그리고 너는 이 광주에서 형산까지 가는 동안 있는 문파들을 알아놔. 하오문에 의뢰하든 어디에 의뢰하든 상관없어. 그리고 쓸 만한 부채를 하나 구해줘. 본래 얼굴로 돌아오면서 부채를 태워버렸거든. 아! 그리고 하오문에 의뢰할 때 의뢰비는 돈이 아니라 무림서생의 용모파기라고 해서 주면 될 거야.”
의뢰비로 무림서생의 용모파기를 주라니… 아린은 놀란 토끼눈을 뜨고 태민을 쳐다보았다.
하오문에 그의 용모파기가 넘어가게 되면 정무련이나 전사맹으로 넘어가게 될 확률이 높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정도의 무인들이나 사도의 무인들이 덤벼들 확률을 무시 못 한다.
“오라버니! 그렇게 하면 앞으로 무슨 일이…….”
“무슨 일이 생길지 나도 알아. 알고 그러는 거야. 어차피 해야 하는 거지만 이래저래 나만 찾아다니는 것은 불공평하잖아. 놈들도 직접 나를 찾아오게 해야지.”
태민의 몸에서 살기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그의 살기를 많이 겪어본 그녀였기에 아무렇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그것은 자신의 착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넘치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는 것인지 살기가 피어오르다 못해 뿜어져 나오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아린은 그 살기가 버티기 힘든지 잔뜩 인상을 쓰며 내공을 끌어올렸지만 그래도 자신의 능력으로는 역부족일 정도였다.
‘진작부터 오라버니께서 강하시다는 것은 알았지만 어느 정도는 내가 감당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이 정도 살기면 내가 감당하기 힘든 수준이라는 소린데 지난 3년간 오라버니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언제 이 정도까지… 큭!’
아린은 이를 악물고 버텨보려 했지만 살기가 너무 강해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오, 오라버니. 지, 진정하세요. 소매가 버티기… 버티기가 너무 힘듭니다.”
태민은 힘겨워하는 아린의 목소리를 듣고 살기를 죽이기 시작했다. 살기가 잦아들면 잦아들수록 아린의 표정이 편안해지기 시작했고 이내 살기가 완전히 가라앉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살기에 눌린다는 게 이런 거였네요. 진짜 장난 아니에요. 그건 그렇고 아까 그 객잔에서 기다리시겠어요? 오라버니께서 시키신 일을 하려면 약간 시간이 걸릴 것 같거든요.”
그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무림서생의 얼굴로 역용하고는 골목을 빠져나갔다.
아린도 그 모습을 보며 다시금 한숨을 내쉬고 역시 골목을 빠져나갔다.
* * *
객잔에서는 아직도 무림서생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가고 있었다. 주된 내용은 그의 행동이 너무 심했다, 다음에는 또 어떤 문파를 멸문시키려나, 정말 무인들 사이에 퍼진 소문처럼 무림을 장악하기 위한 것인가 하는 내용이 주를 이뤘다.
이곳에서 난동을 부리면 자신이 무림서생이라는 것을 알리는 꼴이 된다. 알린다 하더라도 지금 알릴 수는 없기에 태민은 꾹 참았다. 그러나 사람의 참을성에는 한계가 있는 법.
태민의 참을성에도 슬슬 한계가 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한계점에서 더 이상 올라가지 않았다.
때마침 주문한 음식이 나왔고 그는 그것들을 먹는 것으로 화를 풀기 시작한 것이다.
음식을 다 먹어갈 때쯤 다행히 태민의 화도 어느 정도 누그러져 있었다.
그런데 태민이 먹는 양에 놀라서인지 주위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들이 이야기를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시선을 느낀 태민은 기분이 나쁘다는 표정을 지었다. 먹을 때 건드리는 것도 기분 나쁘지만 쳐다보는 것도 기분이 많이 나쁘다.
태민은 먹던 것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두들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이 인간들이…….”
“오라버니! 진정하세요!”
화를 내려는 순간 자신을 말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태민은 고개를 돌려 그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는데 그곳에 아린이 서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부채가 들려 있었다. 그새 다녀온 모양이었다.
아린이 주위를 둘러보며 소리를 질렀다.
“사람 밥 먹는 거 처음 봐요? 사람 밥 먹을 때 쳐다보면 기분 얼마나 더러운지 알아요! 많이 먹건 적게 먹건 우리 오라버니께서 드신 건데 당신들이 왜 그런 눈빛으로 쳐다보는 거예요! 눈 안 돌려요!”
아린의 서슬 퍼런 기세에 쳐다보던 사람들은 냉큼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일부 사람들은 곁눈질로 태민을 힐끔힐끔 보았다. 아린은 그것까지는 막을 생각이 없는지 태민의 앞에 앉았다.
루트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