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아린은 아직 파천류를 제대로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저 오우거들이 지금까지 수련상대가 되어준 오우거인지는 모르지만, 저들을 통해 단시간에 상당한 성장을 볼 수 있었기에 그것에 대한 보답으로 조금 무리를 한 것이다.
아린의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것을 본 루비에드는 그녀에게 회복 마법을 걸어줄까 했지만 치명상을 입지 않은 한 회복마법을 걸어주지 말라는 태민의 엄포가 있었기에 이내 그 생각을 지워버렸다.
처음에는 태민의 그런 말을 무시하고 회복마법을 걸어줬다가 혼난 적이 있었다.
그때 루비에드는 힘겨워하는 것이 측은해서 해준 건데 왜 그러냐고 따졌다.
그러자 태민은 이렇게 말했다.
‘너는 모르겠지만 사람의 치유력은 상당하다. 정말 죽을 상처와 병만 아니면 몸이 자체적으로 치유를 할 수 있어. 나는 녀석의 몸의 치유력을 올려놓고 싶어. 너도 이쪽 세계가 조금만 허투루 생각해도 죽는 곳이라는 걸 알잖아. 내가 옆에 없거나 아무도 도와줄 수 없는 상황이 되면 저 녀석 혼자 헤쳐 나가야 하잖아. 뭐 생각대로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 그리고 흉터가 남을 것 같은 상처가 있으면 그건 치유해줘도 아무 말 안 할게. 저 녀석도 여자인데 흉터 같은 게 남으면 그렇잖아.’
지금 생각해보면 뭔가 말이 되는 것 같으면서도 좀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하지만 그 말에 어느 정도 공감은 했다. 특히 제일 마지막 부분에는…….
“일단 이렇게 보니 상처 입은 게 보이지는 않고… 여느 때처럼 이따가 불러서 따로 확인해봐야겠다. 그건 그렇고 어쩐지 나도 저 무공이라는 것을 배워보고 싶은데? 태민이한테 가르쳐달라고 해봐야겠다.”
루비에드는 아린이 수련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검을 들고 움직이는 건데도 불구하고 상당히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녀는 검은 상대를 죽이는 무기 중 하나로 어떻게든 휘둘러서 상대를 죽이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린이 수련하는 것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솔직히 아린의 움직임에 반한 이후로 그녀에게 가르쳐달라고 해볼까 생각도 해봤다.
하지만 아린이 태민에게 조언을 구하는 모습을 보고 그가 더 잘 아는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미노타우르스 뿔도 뽑을 때는 한 번에 뽑으라고 했다고 당장 가서 가르쳐 달라고 해야지.”
루비에드는 콧노래를 부르며 태민을 찾아갔다.
그 시각 태민은 앞으로의 계획을 정리하다가 순간 서늘한 살기와 맞먹을 정도의 오한을 느끼고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다.
* * *
“언제까지 여기에 있을 생각이야?”
“갑자기 그건 왜 물어보냐?”
루비에드의 뜬금없는 질문에 태민은 의아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이에 그녀는 그를 보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언제까지 여기에 있을 생각이냐고? 남의 집에 신세지고 있는 거면서 염치가 있어야지. 네가 지금 내 집에 있는 시간이 얼마나 오래 된 지 알아? 1년이야, 자그마치 1년! 1년째 남의 집에 머물고 있었으면 이제 적당히 눈치 봐서 나가야 하는 거 아냐?”
루비에드는 얼굴까지 벌게지며 열변을 토했지만 태민은 그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들었는지 실실 쪼개며 그녀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그가 지금까지 이런 적이 없기에 그녀는 적잖이 당황했다. 하지만 그것을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 뭐하는 짓이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태민이 자신의 얼굴을 그녀의 얼굴에 더 가까이 대며 말했다.
“우리 사이에 그런 게 어디 있어.”
“우리 사이가 무슨 사인데 여기서 왜 그 말이 나오는 거냐?”
“에이, 알면서 확인하려고 이렇게 묻는 거봐.”
그 말에 순간 루비에드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리고 어깨동무를 한 팔을 풀고 그를 밀치면서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이 자식이 그동안 놀고먹더니 되게 능글능글해졌네!”
“쳇, 이거면 통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안 통하네.”
태민은 바닥에 주저앉아 아깝다는 듯이 혀를 찼다. 솔직히 루비에드가 나가라는 말을 안 했어도 슬슬 나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미 나가서 해야 할 것에 대한 전반적인 계획은 다 세워놓은 상태였고 나갈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루비에드는 순간 속에서 울컥하는 감정을 느꼈다. 태민이 한 행동을 순간 진심이라고 착각해서 나온 결과였다.
그녀는 울컥하는 감정대로 태민을 밟아버릴까 했지만 그것을 꾹 참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말했다.
“어떻게 할 거야?”
“그렇지 않아도 슬슬 나갈 생각은 하고 있었어. 그동안 정도 들었고 해서 나갈 시기만 엿보고 있었지.”
“밖에 나가서 할 거는 있고? 무작정 나가면 용병짓 말고 할 게 없다.”
“그건 안 해. 설사 하더라도 내 계획을 위해 잠깐 하는 거면 몰라도. 게다가 내가 그동안 그냥 놀고 있던 게 아니거든. 이미 모든 준비를 해놨지. 그 계획대로만 되어준다면 나중에 너를 부르러 올 거야. 네가 꼭 필요한 일도 구상을 해놨거든.”
“내가 꼭 필요한 일이라… 이거 좀 불안한데?”
“불안하다니? 뭐가?”
“네 표정이 상당히 의미심장해. 게다가 내 감각이 그 일이 아주 위험하다고 말하고 있어.”
“쳇, 눈치도 빠르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너는 나올 수밖에 없을 거야. 이건 내가 장담하지. 그리고 부탁이 있는데 돈 좀 주라. 나중에 내 계획이 잘 되면 두 배에다 이자까지 쳐서 갚을 테니…….”
“그 말 나올 줄 알았다. 어디든 돈이 꼭 필요한데 이곳에서는 거지인 네가 돈이 있을 턱이 없지. 돈은 아주 넉넉하게 준비해줄게. 그건 그렇고 언제 떠날 거야?”
“내일 떠나는 걸로 하지 뭐. 잠시 동안의 이별이라고 해도 이별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했잖아.”
“그럼 오늘 준비할 게 좀 많겠네?”
“준비할 게 뭐 있냐? 그냥 아린이나 나나 검 하나씩 들고 돈만 준비해서 가면 되지.”
“내가 너 그 말 할 줄 알았다. 준비는 내가 알아서 해야겠구나. 진짜 네가 내 집에 와서 내가 는 거는 일거리뿐이다. 일거리뿐이야.”
“일거리뿐이라니! 검술도 좀 늘었잖아! 검의 기초도 제대로 안 잡힌 너 가르친다고 내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설마 잊어먹었다고 하지는 않겠지?”
그동안 태민은 루비에드에게 매화검을 가르쳤었다. 안 가르치려고 했지만 원체 조르는 통에 가르친 것이다. 그녀의 신체를 보고 매화검이 좋겠다고 판단하여 그것을 가르친 것이다.
마궁에 있을 때 태민은 갑자기 환검(幻劍)에 대한 관심을 가졌었다. 궁에 있는 무인들 중에는 환검을 제대로 익힌 사람이 없었기에 환검에 대한 책이 없을까 하고 궁의 무고로 들어갔다.
그는 거기서 화산파의 검법인 매화검법에 관한 책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오래전에 기술이 된 책이라서 그런지 부분 부분 빠진 곳이 많았지만 태민은 자신의 머리로 그것을 찾아내고 또 만들어서 자신만의 매화검을 만들어 익혔다. 루비에드에게 가르친 매화검이 바로 그것이다.
“췟! 꼭 지 불리하면 그걸로 우려먹더라. 아무튼 준비는 내가 해줄게. 과거에 유희 몇 번 떠난다고 준비해놓은 게 있으니까…대신 내일 꼭 떠나는 거다.”
“그건 약속하지. 그런데 우리 떠나면 뭐할 거냐? 우리 없으면 너 겁나게 심심할 것 같은데… 설마 그 드래곤이 심심하면 한다는 잠을 자려고 그러는 거냐?”
“아니, 미쳤냐? 수면기간에서 깨어난 지 이제 10년 지났는데 또 자게. 나도 따로 생각해둔 것이 있거든. 너하고 동생이 떠나면 그걸 준비해야지.”
“무엇인지 궁금하군. 뭐 궁금하다고 해도 네가 말해줄 것도 아니니 소용이 없겠지. 그럼 준비는 너한테 일임할게. 대신 제대로 준비해야 한다.”
“그 점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말고…….”
* * *
다음날.
루비에드는 가방 하나를 내밀었다.
“이 안에 필요한 물품들하고 풍족하다 싶을 정도의 돈을 넣어놨어. 이거 들고 세상으로 나가면 큰 문제없이 살 수 있을 거야.”
태민은 아무 말 없이 그것을 받아들었고 아린은 서글프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동안 이런저런 일로 아옹다옹하기는 했지만 그렇게 지내면서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었다.
루비에드 역시 겉으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그들과 헤어지기 싫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자신이 저들을 데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루트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