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파스스.
영혼 포식자 도니골의 심장을 꿰뚫는 순간, 그의 육신은 재가 되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지난 수백 년간 이 행성을 공포에 몰아넣었던 극악무도한 독재자치고는 허망한 최후였다.
“휴우.”
재희는 긴 한숨을 토해 냈다. 그 숨은 오랜 기간 숙성된 위스키만큼이나 짙고도 깊었다.
끝났다. 그간 걸어왔던 여정을 되돌아보는 그의 눈빛은 성취감보다는 고독에 가까웠다.
드럼퀸 행성.
일곱 번째 행성에서의 길고 길었던 대장정도 어느덧 그 막을 내리려 했다.
아니 여덟 번째였던가? 실은 몇 번째 행성인지 이젠 잘 모르겠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숫자 세길 포기했다.
‘이곳과도 작별이군.’
차원을 유랑하는 떠돌이 생활을 얼마나 지속해 온 건지…… 이제는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리운 고향에 대한 추억도 긴 세월의 풍파에 깎이고 깎여, 이제는 아주 사소한 파편만이 드문드문 남아 있을 뿐이었다.
기억나는 건 어릴 적 동네 친구들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뛰놀았던 동네 놀이터, 현관문을 들어서는 순간 물씬 풍겼던 어머니의 된장찌개 냄새 정도랄까.
정작 그 맛있는 된장찌개를 끓여 주셨던 어머니의 얼굴조차도 이젠 가물가물하다. 그럼에도 고향, 즉 지구로 돌아가고 싶은 갈망의 크기는 변함이 없었다.
“아무튼”’
재희는 두 눈을 깜빡였다.
그가 정확히 두 번 눈을 깜빡였을 때, 수치화된 정보들이 각막을 통해 나열되기 시작했다.
디텍트 아이(Detect Eye).
첫 번째 행성 아르비의 지배자, 환몽의 제왕 보르가나스를 제거한 뒤 획득했던 권능이다.
[한재희]
레벨 : 500
칭호 : 영혼 해방자
명성 : 2587020
근력 : 453+307
민첩 : 497+383
체력 : 415+275
감각 : 502+188
마력 : 335+265······.
줄줄이 나열되는 정보는 끝이 없었다.
그는 우두커니 서서 각막 너머로 비치는 자신의 능력치를 한참이나 응시했다.
드럼퀸 행성에서 남긴 그의 자취다.
이 경이로운 업적도 곧 사라질 터. 마지막으로 기억에 담아 두고 싶었다.
‘영혼 해방자라······.’
새로운 칭호를 얻었다.
무고한 영혼들을 닥치는 대로 씹어 삼켜 왔던 도니골을 죽였으니 영혼 해방자라 불릴 법도 하다.
큰 의미는 없다.
어차피 이 칭호도 그가 이룩했던 업적들과 함께 사라질 테니까. 잘게 부서진 도니골의 재에서 무언가가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파지직.
강력한 에너지가 파장을 일으켰다. 굳이 형태를 묘사하자면 안개와 흡사했다.
방대한 양의 영력.
이 행성에서 이렇듯 농밀하고 거대한 영력을 보유한 개체는 도니골 이외에는 없었다.
“드디어.”
재희는 그것을 향해 손을 뻗었다.
모래가루처럼 잘게 부서진 채 허공을 떠돌아다니던 영력들이 그의 손짓에 따라 하나의 구체로 뭉쳐졌다.
“이만하면 충분해.”
그는 영력을 잉크 삼아 손가락에 찍어 바른 뒤, 무언가를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한 획, 한 획 공들여 긋는 서예가 같았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복잡한 문양과 공식들.
‘이번엔 부디 성공해야 할 텐데.’
작업을 진행하는 재희의 표정은 무척이나 신중해 보였다. 악명 높은 도니골을 상대할 때보다도 훨씬 더.
한참 끝에 그가 손을 멈추었을 땐 허공에 정밀하고도 복잡한 마법진이 완성되어 있었다.
마법진 상태를 눈으로 점검하던 그는 그간 모아 왔던 영력들을 깡그리 그러모아 그 안에 쏟아 부었다.
팟.
강렬한 빛과 함께 허공에 나타난 것은 타원 형태의 문이었다.
한 사람이 통과하기에 무리가 없을 정도의 크기.
차원문.
그가 자신의 창조물에게 붙인 명칭이다.
실은 창조물이라기보단 까마득한 과거에 봤던 기억을 더듬어 흉내 낸 결과물이었지만.
차원문 내부에서는 온갖 만물들이 녹아내린 금속처럼 한데 뒤엉킨 채 어디론가 흘러가는 중이었다.
잔잔한 바다를 보는 것 같았다.
바다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 색상이 온갖 물감들을 한데 뒤섞은 것처럼 알록달록했다.
뭐라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형이상학적인 광경.
“······잘 있어라.”
그는 바람결에 혼잣말을 날려 보냈다.
지난 60여 년간 함께했던 드럼퀸 행성에 작별을 고하기라도 하듯이.
그는 차원문을 향해 나아갔다.
차원문과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그가 걸치고 있던 빛나는 갑옷과 무구들은 입자 형태로 흩어져 산산이 부서졌다.
차원문 내부로 한 걸음을 내디딜 무렵엔 전라의 몸이 되어 있었다.
쉬익.
그의 육신이 차원문 너머로 사라졌다.
처음부터 이 행성에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뚝.
이마에 떨어진 차가운 감촉에 재희는 번쩍 눈을 떴다.
무성한 청록의 숲 틈새로 드리워진 먹구름이 보였다. 막 비가 내리기 시작한 모양이다.
“흐음.”
그는 땅바닥에 대자로 드러누운 상태였다.
“늘 이런 식이지.”
혼잣말을 주절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이젠 놀랍지도 않다.
드럼퀸에서는 볼 수 없었던 풍경.
새로운 행성에 도착했다.
‘디텍트 아이.’
재희의 눈동자에 푸른빛이 서렸다.
차원 유랑에 있어, 그나마 다행인 건 행성 클리어 보상은 사라지지 않고 고스란히 남는다는 점이다.
더불어 이전에 영위했던 삶의 기억도.
[한재희]
레벨 : 1
근력 : 10
민첩 : 10
체력 : 10
감각 : 10
“역시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완벽했던 능력치는 고스란히 날아가 버렸다. 이미 수도 없이 겪어 본 일이었으나, 매번 허무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는 실오라기 한 올도 걸치지 않은 맨몸이었다.
잘 깎은 조각상처럼 단단하게 단련되어 있던 근육들도 증발해버린 듯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근육은커녕 마른 장작처럼 빼빼 말라서 살가죽 너머로 갈비뼈가 들여다보일 지경이었다.
툭.
무언가가 그의 발에 걸렸다.
발길질에 채여 데굴거리는 나뭇가지가 보였다.
팔뚝 정도의 길이.
자세히 보니 나뭇가지보다 몽둥이에 가까웠다.
손잡이 부분에 손때 묻은 천이 덧대어져 있는 걸 보니, 누군가 쓰다 버린 물건 같았다. 재희는 망설일 것 없이 그것을 덥석 주워들었다.
부웅.
시험 삼아 몇 차례 휘둘러보니 적당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나쁘지 않았다.
‘무기는 일단 됐고.’
기초무장을 갖춘 그는 주의 깊게 주변을 살폈다.
차원 유랑에 있어, 가장 유의해야 할 순간은 바로 지금. 새로운 행성에서의 첫날이다.
초기화된 육체는 무척이나 나약해진 상태였으니까. 그에겐 이 세계를 파악할 시간이 필요했다.
‘어디 보자.’
재희는 주변을 살폈다.
사방이 온통 숲이었다. 새들의 지저귐 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저만치 앞에서 가던 길을 멈추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뿔 달린 사슴이 보였다.
적어도 드럼퀸처럼 햇빛 한 점도 들어오지 않는 암울한 무저갱은 아니라는 점에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공인가?’
그의 눈빛에 기대감이 스쳤다.
새와 사슴. 울창한 숲의 풍경은 오래전에 그가 알던 지구와 무척이나 비슷했다.
‘드디어 돌아온 건가?’
그 익숙한 광경은 재희로 하여금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기대감에 사로잡히게 하였다.
고향.
수면 아래에 깊숙이 잠겨 있었던 그 단어를 상기하자, 그때까지 잠잠했던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번엔 차원문에 꽤 공을 들였다.
지금까지 겪었던 수많은 좌절을 밑거름 삼아, 마법진의 좌표공식을 보다 짜임새 있게 완성해 냈다.
드럼퀸 행성에서 소환했던 차원문의 완성도는 그 여느 때보다도 완벽했노라고 감히 단언할 수 있었다.
‘아니지.’
잠시나마 밝아졌던 그의 얼굴이 다시금 어두워졌다.
중요한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그가 떠나온 현대의 지구엔 더 이상 이런 울창한 숲과 짐승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긴 괴물들과의 전쟁으로 인해 대지는 싸늘한 죽음의 악취를 풍기는 황무지로 전락하게 된 지 오래다.
가만? 벌써 수백 년이 지난 지구라면 혹시? 모든 재앙이 종결되고 지금처럼 울창한 모습을 회복했을 수도……?
부스럭.
때 아닌 인기척 소리에, 재희는 소리의 근원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일전의 사슴은 아니다.
조금 전까지 근방을 서성이던 그 녀석은 이미 어디론가 사라진 뒤였다.
저벅저벅.
저 발걸음은 이족보행을 하는 생명체만이 자아낼 수 있는 소리였다.
“맙소사.”
풀숲을 헤치고 나타난 존재를 발견하는 순간, 재희의 심장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재희의 앞에 나타난 존재는 인간과 무척 흡사했다.
한 쌍의 귀. 중앙에 솟은 코. 아래의 입술.
각각 두 개씩의 팔다리를 지녔으며 이족보행을 하는 점도 그렇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인간과 흡사하다고 했지, 인간이라고는 안 했다.
지금까진 인간과의 공통점만 늘어놓았으나, 그 공통점만큼이나 차이점도 수두룩했다.
우선 피부가 잿빛이다.
아니, 정확히는 푸르뎅뎅했다.
녀석의 피부는 시체를 떠올리게 했다. 핏기라고는 한 방울도 남김없이 빠져나가기라도 한 것 같다. 이 대목에서 이미 저 녀석은 인간 실격이다.
놈을 발견하는 순간, 재희가 놀란 이유는 공포 같은 것 때문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저놈보다 훨씬 끔찍하게 생긴 몬스터들도 수두룩하게 봐 왔으니까.
‘그놈들과 비슷해!’
그가 미지의 차원 속으로 휘말리기 직전까지, 지구에 출몰하여 재앙을 일으켰던 그 빌어먹을 괴물 놈들.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는 점도 그렇고.’
그럼 정말로 여기가 지구?
저 정체 모를 존재는 아까부터 재희를 향해 곱지 않은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명백한 살의.
딱히 무슨 이유가 있다기보다는 원초적인 본능에 가까워 보인다.
희번덕거리며 노려보는 두 쌍의 눈동자는 굶주린 짐승에 가까운 것이었다.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온 놈의 송곳니가 보인다.
비정상적으로 발달한 이빨이었다.
재희는 저 송곳니의 무서움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눈앞에서 저 이빨에 사지가 잘려 나가는 사람들을 셀 수 없이 봐 왔으니까.
저 우악스러운 주둥이는 뼈마저 통째로 잘라 버린다.
디텍트 아이를 통해 녀석의 분석을 마친 재희는 심심한 소감을 내뱉었다.
“꽤 높은데?”
힘과 민첩, 체력과 감각이 모두 30을 웃돌았다.
첫 상대치고는 꽤 강한 녀석이다.
과거 지구에서는 아무런 능력도 없었기에 놈들이 어느 정도로 강한지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봐.”
“크르륵.”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말을 건네 보았으나, 누런 이를 드러낸 녀석은 늑대 비슷한 울음으로 화답할 뿐이었다.
“내 말 알아들어?”
“크륵!”
“이왕이면 대화로 하자고.”
“크르릉!”
“역시나…….”
체념한 재희는 몽둥이를 고쳐 잡았다.
괴물과의 의미 없는 소통을 단념하는 순간 그의 태도는 180도 바뀌었다.
괴물은 변함없이 재희를 향해 끔찍한 살기를 방출하는 중이었다. 제대로 갈무리조차 되지 않아 살갗이 저릿할 정도의 살의.
본능만이 전부인 저 짐승 같은 놈의 행동을 막을 방법은 하나뿐이다.
“미친개한텐 몽둥이가 약이지.”
“크아악!”
시끄러운 괴성과 함께, 잿빛 괴물이 재희를 향해 달려들었다.
빠르다.
능력치가 높은 놈답게 돌진 속도가 상당했다.
20미터 이상 벌어져 있던 둘 사이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정민택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