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그야말로 아비규환.
피비린내와 괴물들의 썩은 내가 진동했다.
예전의 그였다면 그 광경에 충격을 받아 며칠간 아무것도 먹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참혹한 광경에 닳고 닳은 지금은 무덤덤한 시선을 고수할 뿐이었다.
‘슬슬 반응을 보일 때가 되었는데.’
아무리 후방에서 조용히 일을 벌였다지만, 누군가는 창을 던져 괴물을 쓰러뜨린 이가 재희였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터.
아니나 다를까.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진다.
재희는 고개를 돌렸다.
철제 갑옷으로 무장한 기사였다.
서너 명의 병사들을 대동한 기사는 이쪽으로 접근하는 중이었다.
‘그럼 그렇지.’
기척을 감추고 아무도 모르게 은밀히 일을 처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괴물을 제거하여 경험치를 획득하는 것만이 목적 전부는 아니었다.
경험치도 경험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이 세계를 알아가며 차차 적응해 나가는 것이었다.
대화가 통하는 지성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낸 마당에, 굳이 혼자서 어렵게 이 세계를 파헤쳐 나갈 이유는 없다.
재희는 잠자코 그들이 접근하길 기다렸다.
갈색 머리기사의 이목구비가 뚜렷하게 보일 정도로 거리는 가까워졌다.
땀으로 흠뻑 젖은 머리카락과 피가 튄 갑옷은 그가 얼마나 치열한 전투를 치러왔는지 짐작할 수 있게 했다.
“고마워.”
기사가 처음으로 건넨 말은 그러했다.
“덕분에 살았어. 네가 머슬을 잡아 주지 않았다면, 지금쯤 하울링들의 한 끼 식사가 되었을지도 몰라. 참. 나는 클로버 보병대의 상급 부관 라미로라고 해.”
자신의 이름을 밝힌 라미로라는 사내는 재희에게 악수를 청했다.
라미로의 반말은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재희의 어려 보이는 외모 때문.
재희가 차원을 방황한 세월은 까마득하게 길었으나, 수백 년이 지났음에도 그의 외모는 변함이 없었다.
10대 후반의 외모.
넉넉히 쳐줘도 20대 초반 이상으로는 봐 주기 어렵다.
처음 차원에 휘말렸을 당시의 모습 그대로였다.
더군다나 지금은 괴물이 입고 있던 누더기로 겨우겨우 맨몸을 가린 채였다.
귀족은커녕 거지 취급이나 받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러니 모로 봐도 라미로가 그에게 존칭을 사용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라미로가 무례하거나 오만하게 굴고 있느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었다.
스스럼없는 말투나 분위기로 봐서는 쾌활한 부류의 성격 같았다. 나름대로 사교성도 갖춘 것 같았고.
재희도 겉치레에 얽매이는 성격은 아니었다. 오히려 자유분방한 쪽에 가까웠다.
디텍트 아이는 자신을 향한 라미로의 호감도가 15라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호감도는 0에서 최대 100까지의 범위로 표시된다.
가끔 예외인 경우도 있긴 하다.
예를 들어 적대적이거나 악감정을 가진 상대의 경우, 마이너스로 곤두박질치기도 했다.
-100인 경우 철천지원수.
+100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곧이듣는 관계라고 이해할 수 있으리라.
초면인 상대는 보통 0에서부터 시작한다.
이름이 널리 알려질 정도로 명망이 높은 경우에는 일면식조차 없음에도 플러스 수치를 기록하는 경우도 있긴 하다.
하지만 현재의 재희는 이 세계에서 전혀 알려지지 않은 존재.
라미로와 초면이라는 걸 감안하면 15라는 수치는 그가 재희에게 꽤 호의적이라는 걸 의미했다.
“재희라고 합니다.”
재희는 라미로가 건넨 손을 가볍게 맞잡았다.
이 행성의 단어에 대해선 무지했던 재희였지만, 통역 스킬 덕분에 의사소통에 문제는 없었다.
“제이라…… 기억하기 쉬운 이름이네.”
늘 이런 식이었다.
라미로는 편한 식으로 재희의 이름을 기억해 버렸다. 발음의 유사성으로 흔히들 혼동하는 이름이었다.
굳이 그걸 정정해 줄 생각은 없었다. 처음 있는 일도 아니고. 이제는 익숙해졌다.
“물어보고 싶은 게 많지만, 일단은 나도 명령을 받고 온 처지라서. 괜찮다면 잠깐 시간을 내어 줄 수 있을까? 부대장님께서 널 보길 원하시거든.”
‘지휘관의 눈에도 들어갔던 모양이군.’
처음부터 상위 계급으로 예상되는 기사가 접근할 때부터 대강 짐작하긴 했다.
“물론입니다.”
재희는 선선히 제안을 받아들였다.
소문만큼 빠른 건 없다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다.
라미로를 따라가는 내내, 주변 병사들의 시선이 한 몸에 느껴졌다.
머슬을 쓰러뜨린 자가 검은 머리의 방랑자라는 소문이 벌써 일파만파 퍼져 나간 모양이었다.
호기심 어린 시선들이 일방적으로 자신을 향해 쏟아지고 있음을 재희는 느꼈다.
그들은 하나같이 재희를 엿보며 저들끼리 뭐라 뭐라 쑥덕거리기 바빴다.
“저기 보이는 저분이 우리 부대장님이셔.”
라미로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재희는 시선을 옮겼다. 라미로와 마찬가지로 철제 갑옷을 걸친 기사의 모습이 보였다.
어두운 빛이 감도는 은색의 머리카락은 차가운 금속성의 느낌에 가까웠다.
부대장은 냉철한 인상의 소유자였다. 잘 벼리어진 무기를 보는 듯한 기분이라고나 할까.
그는 제 앞에 기립한 기사들을 향해 무언가 지시를 내리느라 여념이 없어 보였다.
그의 지시를 경청하는 기사들은 아마도 라미로와 같은 부관이 아닌가 싶었다.
‘부대장이라고 해서 제법 연령대가 높은 사람이라고 짐작했는데.’
그런 재희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부대장은 꽤 젊은 편이었다. 20대 후반 남짓. 적어도 외관상으로는 라미로와 별 차이가 없어 보였다.
부대장은 아직 이쪽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라미로는 제 상관을 부르지 않고 잠자코 대기했다.
처음엔 왜 그러나 싶었는데, 인제 보니 제 부대장이 하던 일을 끝마치길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라미로는 재희를 힐끔 보더니, 옅은 미소를 지으며 양해를 구하는 듯한 눈짓을 보냈다.
“우리 부대장님이 한 가지에 몰두하면 아무리 옆에서 이름을 불러도 못 알아들으시거든.”
재희는 그러마 하고 너그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못 기다릴 것도 없었다.
오히려 잘됐다.
그 사이 재희는 부대장이라는 인물을 관찰하기로 했다.
‘아.’
어쩐지 낯이 익다 싶었는데 이제야 그 이유를 알겠다. 숲속에서 전투를 관찰할 때, 부대 내에서 가장 높은 능력치를 보유했던 인간이었다.
[카일 레오나드]
레벨 : 61
칭호 : 냉철한 지휘관
명성 : 1521
잠재력 : -C
힘 : 69+8
민첩 : 81
체력 : 68
감각 : 75+8
마력 : 32
‘이름이 카일이었군.’
재희는 각막에 나열되는 카일의 정보를 읽었다.
인간치고는 굉장히 뛰어난 전사다.
잠재력이 고작 -C인 데다가 젊은 나이임을 참작하면 도출되는 결론은 하나.
엄청난 노력파라는 의미.
장기적인 시점으로 봤을 때 가장 중요한 항목은 단연 잠재력이다.
당장 쓸 만한 능력을 갖췄어도 잠재력이 낮다면 더는 괄목할 만한 성장을 기대하기 어려울 테니까.
잠재력은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다.
이따금 그런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던가?
태어나자마자 글을 깨우치고, 걸음마를 떼기도 전에 남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고등학문을 깨우쳐버리는 천재 말이다.
괜히 불공평한 세상이라고 다들 투정하는 게 아니다.
물론 노력 여하에 따라 제법 높은 경지에 올라서는 범인(凡人)도 존재하긴 한다.
하지만 결국 피라미드의 꼭짓점에 마련된 자리는 언제나 재능 있는 자들의 몫.
행성마다 조금씩 괘가 달랐지만, 평균적으로 일반인은 F에서 E 사이의 잠재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럭저럭 봐줄 만한 녀석은 D등급.
꽤 재능 있는 자는 C등급가량.
사실 C등급만 되어도 한 가지 특기에 집중한다면 그 분야의 달인을 노려볼 만도 하다.
이 기준은 무수한 행성을 돌아다니면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왔던 재희가 세워 놓은 나름의 집대성이었다.
비록 주관적이라고는 하나, 오랜 시간에 걸쳐 조금씩 확립해 온 기준이었으니 꽤 정확한 편이라 볼 수 있었다.
이것은 단순히 신체의 전투력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다.
실제로 신체능력의 등급이 F여도 예술에 A등급을 가진 대가를 만난 적도 있었으니까.
디텍트 아이가 제공하는 정보는 실로 방대했다.
이는 장점이기도 하나, 바꿔 말하면 그 방대한 정보를 필터링하지 않는다면 한도 끝도 없다는 의미다.
지금처럼 재희가 관심 있는 분야만 따로 노출되도록 설정해 놓지 않았다면, 지금쯤 그의 머리는 과부하가 걸렸을지도 모르겠다.
‘성(姓)이 따로 존재하는군.’
카일의 성은 ‘레오나드’.
신분이 존재하는 세계란 의미다.
병사들의 정보를 엿보면 이름만 덩그러니 존재하는 경우가 절대적이었다.
그러고 보면 라미로도 ‘에를렌’이라는 성을 보유하고 있었다.
병사들도 그렇고, 중세의 기사를 연상시키는 라미로와 카일의 무장 상태를 비교해 보면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이다.
다만 과거의 지구와 차이점이 있다면 ‘마력’이 존재한다는 것.
카일은 마력 수치는 32.
마력은 쉽게 말해 주문력이다.
시전하는 마법의 효과를 증폭시켜 주는 수치.
공격마법이라면 파괴력을, 회복마법이라면 회복 효과를 올려준다.
다만 카일의 경우는 검을 다루는 기사이니, 마법사보다는 오러 유저일 가능성이 높았다.
이제 와 돌이켜보면 지구에도 마력이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마나, 차크라, 기, 내공…….
지역별로 다른 이름으로 불리긴 했지만 결국은 같은 물질을 지칭하는 단어다.
단지 다른 행성에 비해 물질의 농도가 지극히 낮았을 뿐. 마법 등으로 에너지를 변환하기엔 부족한 수치다.
이따금 세상에 등장하는 뛰어난 예언가라던가 무당 등의 직종이 마력을 감지하는 감각이 발달한 부류이다.
보통은 사기꾼이라며 손가락질을 받기 일쑤이지만.
이런 사람들이 마력이 풍부한 다른 행성에 태어났더라면, 사기꾼이 아닌 위대한 마법사가 되었을 거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군.”
재희는 상념에서 벗어났다.
부관들을 돌려보낸 카일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카일이라고 하네.”
카일은 그 흔한 수식어 하나 없이 간단 명료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본의 아니게 큰 도움을 받았군. 제이라고 했던가?”
“예.”
재희는 슬쩍 고개를 숙였다.
“나와 라미로 부관은 자네가 창을 던지는 모습을 우연히 목격했네.”
잠시 망설이던 카일이 말을 이었다.
“한 마디로 굉장하더군.”
그의 말투에서는 솔직한 감탄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래서 궁금했네. 자네의 정체가 대체 무엇인지.”
상대를 꿰뚫어보는 듯한 잿빛 눈동자.
‘냉철한 지휘관’이라는 칭호가 더없이 잘 어울리는 사내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할까.’
새로운 행성에 정착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누군가에게 자신을 소개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그때마다 그는 자신의 과거를 날조해야만 했다.
‘전 사실 행성을 떠돌아다니는 유랑자입니다.’
……이딴 소리를 늘어놓았다간 정신병자 취급이나 받을 테니까.
이 행성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한 상태였다면 어떻게든 출신이나 신분 등을 지어낼 수 있었을 거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이 행성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이었으니까.
어느 지역에 어떤 도시가 있고, 그 도시는 어떠한 특색을 갖췄는지.
정민택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