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단창에 머슬을 잡는 저력을 보여 주지만 않았어도 그들은 그를 우습게 여겼으리라.
‘예상외로 자유분방한 분위기로군.’
조잘조잘 떠들어 대는 병사들을 보며, 재희는 그런 생각을 했다. 정말 이 행성이 중세시대와 유사하다면 이 무렵의 병사들 대다수는 징집병일 테니까.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강제로 군에 끌려온 이들의 분위기가 이렇게 밝을 수가 없다.
그렇다는 것은 봉급을 받는 직업 군인일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
용병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잠시 들었지만, 그리 신빙성 있는 가설은 아니다.
이들을 지휘하는 카일과 라미로는 귀족이다.
귀족씩이나 되는 작자들이 용병단을 이끌 가능성은 희박하리라 판단되었다.
행성마다 조금씩 괘가 다를 테지만, 대개 용병이란 작자들은 칼을 찬 부랑자와 다를 게 없다.
더군다나 용병이라고 치부하기엔 이들은 그럴싸한 명령 체계와 장비들을 갖추고 있었다.
‘좀 더 알아봐야겠군.’
“거참. 시끄러워서 잠을 잘 수가 없잖아!”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던 찰나, 한구석에 드러누워 잠을 청하던 한 사내가 역정을 내며 이쪽을 돌아보았다.
거한의 사내였다.
앉은키만으로도 다른 이들을 압도할 정도다.
짐작하건대 그의 신장은 2미터에 육박하지 않을까 싶었다.
저렇게 앉은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커다란 바위와 마주한 기분이었다.
갈색 머리 사내의 나이는 대략 20대 중반 남짓.
송충이처럼 짙은 눈썹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그 외에도 이목구비 하나하나가 전부 큼직큼직해서, 마치 모아이 석상을 보는 것 같았다.
“뭐야? 이 녀석은.”
신경질적이던 사내의 시선이 화제 인물인 재희를 향했다. 못 보던 얼굴이다.
“브록. 넌 이 녀석이 무슨 일을 벌였는지 못 봤지? 아마 봤다면 너도 까무러쳤을 거다.”
병사 하나가 기다렸다는 듯 촉새처럼 주절거리기 시작했다. 아마 저 거인을 닮은 사내의 이름이 브록인 모양이다.
“저 쪼그만 놈이 대체 뭘 어쨌다고 이 난리들이야?”
브록은 심드렁하니 약지로 귀를 후볐다.
전혀 관심 없다는 말투였다.
“설마 머슬을 잡았다는 꼬맹이냐? 보나 마나 우연이겠지. 저 보잘것없는 몸집으로는 머슬은커녕 계집애 하나 만족하게 해 주지 못할걸!”
“푸하핫!”
그의 거친 입담에 병사들이 자지러지라 웃어댔다.
“사흘 안에 전쟁터에서 소리 소문없이 변사체로 발견되리라는 데 내 손모가지를 걸지.”
브록이 빈정거렸다.
그의 덩치가 압도적으로 크긴 했으나, 다른 병사들 또한 대체로 일반인보다는 우람한 체격이었다.
무기를 다루는 이들인 만큼 전신이 근육으로 잘 단련되었던 탓이다. 심지어 일반인에 가까운 체격을 지닌 병사들조차도 재희보다는 크다.
이 세계 남자들의 평균 키는 180을 훌쩍 넘기지 않을까?
그러니 재희가 얕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헹. 아무리 운이 따라줘도 브록, 넌 머슬 놈에게 흠집 하나 못 낼 걸?”
“맞아. 신참이 창 던지는 장면을 내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이 녀석 물건이더라니까?”
재희를 변호하기라도 하듯 병사들이 앞다투어 브록의 면전에서 떠들어댔다.
“이것들이 단체로 뭘 잘못 처먹었나.”
하지만 막 잠에서 깬 브록에겐 되지도 않는 개소리로 들릴 뿐이었다.
“저 코딱지만 한 녀석이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들 떠들어 대는 건지 모르겠군.”
브록은 콧방귀를 뀌며 재희를 내려다보았다.
대놓고 무시하는 태도였다.
‘귀엽네.’
그런 어린애 같은 브록의 빈정거림에, 재희는 픽 웃을 뿐이었다.
어딜 가나 자신을 얕보는 녀석들이 적지 않았다. 크게 눈에 띄지 않는 그의 체격 때문이었다.
눈앞의 브록은 그런 수많은 무리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
하찮은 도발에 넘어갈 만큼 재희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물론 힘으로 제압해 버릴 수도 있지만, 그런 녀석들을 일일이 상대하는 것도 피곤한 일이다.
“웃어?”
브록의 이마에 힘줄이 솟았다.
알아서 적당히 설설 길 줄 알았는데, 오히려 자신을 비웃는 게 아닌가?
브록은 호승심이 샘솟음을 느꼈다.
알아서 찌그러졌더라면 적정선에서 봐줬겠지만 이젠 어림도 없다. 그의 머릿속엔 반드시 저 쪼그만 녀석을 뭉개 버리겠다는 일념뿐이었다.
험상궂은 분위기는 점점 고조되어갔다.
“어이. 브록. 그쯤하라고.”
병사들은 그런 브록을 나무랐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제지하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관망하는 중이었다.
불구경, 그리고 싸움 구경만큼이나 재밌는 건 없으니까.
시커먼 사내들만 잔뜩 모인 이 삭막한 전쟁터에서, 그들의 낙은 일주일에 한 번씩 지급되는 김빠진 맥주와 이따금 발생하는 싸움 구경 정도다.
아무래도 주변 분위기를 보아하니 브록이라는 녀석은 병사 중에선 꽤 인정받는 존재인 모양이었다.
호기심이 인 재희는 디텍트 아이를 발동했다.
[브록]
레벨 : 28
소속 : 클로버 보병대
칭호 : 행동대장
명성 : 403
잠재력 : B
근력 : 50+5
민첩 : 21
체력 : 45+5
감각 : 24
‘이것 봐라?’
물론 일개 병사치고는 굉장히 우수한 능력치였고, 전쟁터에서 닳고 닳았다고 나름 자부하는 것 같은데 재희의 기준에서는 애송이에 불과했다.
재희가 눈여겨본 건 현재 그의 능력치가 아닌 브록의 잠재력이었다.
B등급 이상의 자질을 지닌 자는 그리 흔하지 않다.
이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수도 있을 재목이었다. 물론 그전에 제대로 성장을 마쳐야겠지만.
브록은 힘과 체력에 집중되어 있었다.
다만 민첩이 상대적으로 낮다.
신체의 균형을 제어하는 감각도 평균 이하.
보나 마나 이 녀석은 근력을 이용해 상대를 압도하는 방식으로 지금껏 싸움을 치러왔을 거다.
사실 능력치를 보지 않았더라도 거구의 체격과 근육이 집중적으로 발달한 부위를 보면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나쁘지 않아.’
이 녀석은 아직 제 잠재력을 제대로 터뜨리지 못했다.
이대로 내버려 둔다면 꽃 한 번 제대로 피워보지도 못할 운명.
한 마디로 브록에겐 스승이 필요했다.
재희는 좋은 스승이 되어 줄 자격이 충분했고. 아니, 최고의 스승이라고 자부할 수 있었다.
수백 년을 영위해 오며 다방면에 통달한 존재는 그 이외엔 없을 테니까.
‘그냥 지나치기엔 아쉬운 녀석인데.’
원래는 적당히 무시할 생각이었는데 마음이 바뀌었다.
‘쓸 만한 동료들을 모아야 한다.’
일전에 쓰러뜨린 머슬은 아무것도 아니다.
인간의 육체를 닥치는 대로 섭취하는 하울링들은 무서우리만큼 강해지니까.
혼자서 모든 하울링을 쓰러뜨릴 수는 없다.
재희에게 가장 필요한 건 그의 곁에서 함께 싸워줄 동료들이었다. 잠재력 B등급 정도 되는 녀석을 동료로 삼을 수 있다면 차후에 큰 보탬이 되리라.
‘그런데 아무래도 굉장히 얕보이고 있는 것 같군.’
이런 상태로는 녀석을 가르칠 수 없다.
‘어쩔 수 없나.’
유치하게 누가 더 강하니 어쩌니 티격태격하는 건 질색이지만 다른 방법이 없다.
브록을 가르치려면 그 전에 녀석을 굴복시켜야 할 필요가 있었다.
적당히 때려눕히는 정도로는 안 된다.
자신과 녀석 사이엔 압도적인 격차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실히 인지시켜 주지 않는다면 녀석은 쉬이 재희를 인정하려 들지 않을 테니까.
“한 주먹거리도 안 되는 게.”
그 와중에도 브록의 도발은 그치지 않았다.
연신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는 걸 보니, 은근히 재희가 도발에 넘어오기를 바라는 모양이었다.
그래야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이 꼬맹이를 묵사발 내버릴 명분이 생길 테니 말이다.
‘어쩔 수 없지. 도발에 넘어가 주는 수밖에.’
재희는 확실히 마음을 정했다.
“정말 내가 한 주먹거리도 안 될 거라 생각해?”
“뭐?”
순간 좌중이 고요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껏 잠잠했던 재희가 브록의 명백한 도발을 처음으로 맞받아치는 순간이었다.
재희가 끝끝내 브록을 무시로 일관했더라면 그도 재희를 어찌할 수는 없었을 거다.
병사들은 당연히 박힌 돌과 굴러온 돌 간의 빅 매치를 기대하고 있었고, 무덤덤함으로 일관해 왔던 재희의 반응을 내심 아쉬워하던 참이었다.
그의 당찬 대답에 브록은 잠시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
그러다 곧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비로소 자신이 원했던 대로 상황이 흘러가기 시작했으니까.
“큭큭. 꼴에 자존심은 있다는 거냐?”
브록이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재희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막사의 입구를 향해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브록을 비롯한 병사들은 뭘 하려는가 싶어, 그런 재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인제 와서 내뺄 속셈이냐? 그럼 그렇지. 어디서 굴러들어온 개뼈다귀 같은 놈이 어디서 감히…….”
“뭐해?”
막사 입구에 드리워져 있던 가림막을 걷어 올린 재희가 브록의 말을 싹둑 잘랐다.
“언제까지 거기 앉아서 주둥이만 털 생각이야?”
“……뭐?”
브록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었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재희를 올려다보는 순간, 전신이 얼어붙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한없이 차가운 눈빛.
온순했던 지금까지의 이미지와는 전혀 상반된 두 눈동자가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상대는 자신보다도 훨씬 체격이 작은 어린 녀석이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거대한 맹수와 마주친 것 같은 위압감이 들었다.
‘어째서지?’
소름이 돋았다.
“얼른 튀어나와. 지옥을 보여 드릴 테니까.”
재희의 목소리에 브록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냐. 그럴 리가 없지.’
브록은 자조적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런 땅딸막한 녀석에게 위압감을 느끼다니.
잠깐 머리가 어떻게 되었던 게 분명하다.
“오오오!”
“생긴 거와는 다르게 화끈하구먼!”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들려왔다.
그렇지 않아도 기름을 엎지른 짚더미처럼 위태위태했던 분위기는 재희의 선전포고로 완전히 불이 붙었다.
소문은 일파만파로 퍼져, 재희와 브록이 널찍한 공터에 자리를 잡았을 무렵엔 사방이 구경꾼들로 가득 찬 뒤였다.
“뭉개 버려, 브록!”
“16조의 힘을 보여 주라고!”
병사들의 대다수는 브록의 편이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병사 중에서 실력으로 단연 손꼽히는 브록은 클로버 보병대의 자존심과도 같았다.
그간 동고동락해 왔던 세월도 있었고.
그의 숱한 활약상을 줄곧 지켜봤던 동료들이었기에, 브록이 패배하리라 생각하는 이는 극히 드물었다.
다른 걸 다 떠나서, 객관적으로만 봐도 그렇다. 체격상으로도 브록이 단연 압도적이었으니까.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 수준이었다.
“신참! 네 힘을 보여 줘!”
소수였지만 재희를 응원해 주는 이도 있었다. 첫 등장에서의 파급력이 생각보다 컸던 모양이었다.
실력이든 운이든 창을 던져 머슬을 잡았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긴 했으니까.
그마저도 말도 안 되는 사기극이라며 불신하는 녀석들도 있는 것 같지만.
“살아 돌아갈 생각은 말아라.”
브록이 손가락 관절을 꺾으며 으름장을 놓았다.
그는 자신을 향한 동료들의 환호성에 보답하듯 여유 있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재희는 심드렁한 얼굴로 멀뚱멀뚱 서 있을 뿐이었다.
정민택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