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여기서 재희는 기절한 브록을 챙겨 줌으로써, 병사들에게 인간미를 보여 주는 방법을 택했다.
브록에겐 충분히 겁을 준 것 같으니 이만하면 됐다.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고, 재희는 브록이 정신을 잃은 사이에 다친 얼굴과 오른손을 대강 치료해줬다.
‘슬슬 구급법을 획득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차라리 잘됐네.’
구급법은 부상당한 신체를 대상으로 실행해야 습득할 수 있는 기술이었으니까.
[구급법 습득!]
[스킬 대성공!]
[수련도 : 10% (F랭크)]
[사용 시, 10% 추가 체력 회복.]
[보너스 : 체력 : +5 물리저항 +5%]
구급법 자체는 상위 랭크가 되지 않는 이상, 크게 효율이 없었으나, 반드시 배워야 할 이유가 있었다.
[한재희]
레벨 : 21
소속 : 클로버 보병대
칭호 : 없음
명성 : 157
근력 : 65
민첩 : 40
체력 : 35
감각 : 35
물리저항 : 5%
지금까지 상태창에 존재하지 않았던 ‘물리 저항’이라는 새로운 능력치가 생겼다.
히든 스텟이다.
히든 스텟은 처음부터 기본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근력과 민첩 같은 기본 능력치와는 달리, 특정 조건을 달성해야 습득할 수 있는 숨겨진 능력치를 뜻한다.
물리 저항은 말 그대로 물리적 피해를 입었을 시, 저항력 수치만큼 피해를 반감시켜 주는 중요한 스텟이다.
레벨업 시 주어지는 5 포인트는 처음엔 넉넉하다고 여겨질지 몰라도, 이런 히든 스텟을 하나하나 획득해 나가다 보면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레벨업 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니, 결국은 스킬 수련과 고급 장비들로 부족함을 메워야 한다는 뜻이다.
“제이, 넌 성인군자라도 되냐?”
“크! 아깝다. 나 같았음 기절한 사이에 이 녀석을 저 멀리 숲속에 던져 버리고 왔을 텐데.”
재희가 브록을 치료해 주자, 브록을 응원했던 동료들마저 재희의 편을 들어줄 정도였다.
그가 브록에게 베풀어준 자비는 꽤 생산적이었다고 볼 수 있겠다.
물론 숲속에 던지느니 마느니 하는 건 병사들 특유의 거침없는 표현방식일 뿐, 진심은 아니었으리라.
아무튼, 덕분에 재희는 첫날부터 수월하게 이 집단에 녹아들 수 있었다.
‘이 부대에 얼마나 오래 머무르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원활한 관계를 유지해서 손해 볼 일은 없을 테지.’
보통 군부에 소속된 자들은 대개 성정이 거칠기 그지없으나, 한 번 마음을 열면 진득한 동료애를 표출하기 마련이다.
싸우니 뭐니 해도 결국은 위기의 순간에 등을 맡겨야 하는 상대는 이 자리에 있는 동료들뿐이니까.
“휘유! 첫날부터 꽤나 요란하구나. 제이.”
“부관님.”
휘파람 소리의 주인공은 라미로였다.
“물의를 일으켜 죄송합니다.”
먼저 시비를 건 쪽은 브록이었지만 일단은 정중히 사과했다.
엄밀히 따지고 보면 재희 쪽에서 꾹 참고 넘겼다면 일이 이렇게까지 커지지도 않았을 터.
소동을 벌일 때부터 각오하고 있었던 일이었다. 군대란 본디 엄격한 군율이 지배하는 독립된 세계니까.
“아아. 딱히 나무랄 의도는 아니었어. 보나 마나 브록, 그 녀석이 먼저 신경을 긁었겠지. 고집불통 황소 같은 녀석이니까. 그래도 아주 막돼먹은 놈은 아냐. 나름대로 의리도 있고, 윗사람들에게 깍듯한 편이기도 하지.”
의외로 라미로는 그를 나무라지 않았다.
오히려 재희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해 주었다.
재희는 막사 안에서 기절해있을 브록을 생각하며 픽 웃었다.
‘스톤 스킨(Stone Skin)을 발동한 대상을 상대로 맨주먹을 내질렀으니 지금쯤 오른손이 꽤 얼얼한 거다.’
“사실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되리라고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거든. 용병들이 대개 그렇잖아?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거칠고, 신참 괴롭히기 좋아하고.”
“방금 용병이라고 하셨습니까?”
“응. 저 녀석들 대다수는 용병 출신이야.”
‘디텍트 아이의 정보노출을 지나치게 간략화 했던 모양이군.’
솔직히 정보의 노출 범위를 조금만 높게 설정해 두었어도 그들의 출신쯤은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을 거다.
“용병이라곤 해도 윗선을 우습게 보진 않지. 보다 높은 봉급과 명예를 얻기 위해선 우리에게 잘 보여야 할 테니까. 게다가 녀석들과도 꽤 오랜 기간을 함께해 온 덕분에, 출신에 대한 편견은 많이 희미해진 편이야.”
자유로운 분위기.
처음 엄격한 규율과 체계적인 전술로 하울링들과 대적하는 광경을 목격했을 땐, 이들이 당연히 국가의 정규군인 줄 알았다.
그런데 전투 외적인 면에선 꽤 자유분방한 분위기여서 내심 놀랐다.
병사들끼리 가벼운 주사위 도박을 즐길 정도였으니까.
“우리도 용병들을 지나치게 억압하진 않아. 선을 넘지 않는다면 크게 나무라진 않지. 네가 겪었던 신고식도 마찬가지고.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상황이니까. 우린 노련한 병력을, 용병들은 돈을 원하지."
서로간의 암묵적으로 합의를 본 셈이다.
“부관님께서도 이미 짐작하고 계셨던 거군요.”
“하하. 부디 서운하게 받아들이진 말아 줬으면 좋겠어. 사실 우린 저들 사이에서 네가 겪을 곤경보다는, 네가 어떤 방식으로 저 녀석들을 휘어잡을지 내심 기대하고 있었거든.”
“서운하다니, 당치도 않습니다.”
재희는 빙긋 웃음을 지었다.
‘우리’라니.
그런 기대를 한 건 라미로뿐만이 아니었던 듯하다. 그는 자연스레 카일의 얼굴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생김새만 놓고 보면 부하들을 숨도 못 쉬게 만들 엄격한 위인 같았는데 그런 융통성이 있을 줄이야.
‘이제 좀 이해가 가는군.’
정규군과 용병의 특징이 뒤섞인 이 희한한 집단에 대한 의문이 조금은 풀렸다.
“용병들과 연합 구도를 펼치게 된 건 다 하울링, 그놈들 때문이지.”
라미로는 재희가 굳이 묻지 않아도 알아서 설명을 보태 주었다. 라미로 부관이 수다스러운 성격이라서 다행이었다.
사실 일개 병사에게 이렇게까지 친절하게 대하는 상관은 드물다.
사실 전 행성을 통틀어도 몇 없을 것이다. 특히 상위계층 중에선 더욱더.
인간들은 평상시엔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다가도, 자신들의 존재를 위협하는 무언가가 나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서로 합심하여 위기와 맞서곤 했다.
행성들을 유랑하면서 가장 신기했던 건 기이한 생김새를 지닌 타 종족이나 그들이 형성한 독특한 문화가 아닌 인간 특유의 특성이었다.
어딜 가나 인간들은 틀에 박힌 듯 똑같은가 싶으면서도 이따금 기상천외한 모습을 보여 주곤 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전형적인 귀족들과는 거리가 먼 라미로 역시 틀에 박힌 인간상은 아니었다.
“하울링은 최하 등급인 노멀마저도 보통 인간보다 서너 배는 강한 괴물이니까. 기존의 징집병 만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거든.”
라미로는 쓰게 웃었다.
“아무튼, 하울링들의 군세는 해를 거듭할수록 커져서, 점차 심각한 문제로 대두하게 되었지.”
그렇게 말하는 라미로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국가에서는 병력보다는 개개인의 양질을 점차 우선시할 수밖에 없었겠지. 징집할 수 있는 병력에도 한계가 있었을 테고.’
죄다 병사로 차출한다면 농사는 누가 지을 것이며, 사냥은 누가 한단 말인가?
‘그래서 용병들의 힘을 빌리게 된 건가.’
아무래도 싸움을 생업으로 일삼는 자들인 만큼 전투력 하나만큼은 징집병들을 능가했을 테니까.
억지로 끌고 온 징집병에게 다루지도 못하는 칼을 쥐어주는 것보다야, 아예 칼깨나 다루는 자들을 고용하는 편이 훨씬 낫다.
싸움에 능한 이는 당연히 한정적이다. 하울링들이 활개를 칠수록 전사들의 가치는 높아질 수밖에.
수요와 공급. 당연한 변화이다.
‘보아하니 정규군의 전술에 잘 녹아들 정도로 오랜 시간 함께 해 왔던 것 같고.’
처음엔 갖은 시행착오를 겪었을 거다.
일생을 제멋대로 날뛰어온 야생마들을 길들이기란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니까.
‘용병들이 정규군의 전술에 잘 녹아들었다는 건, 하울링들의 등장이 최근에 벌어진 일은 아니라는 뜻이겠지.’
재희는 머릿속으로 나름의 추측을 펼쳤다.
“심지어 농부들조차도 제 자식에게 곡괭이가 아닌 칼을 쥐여 준다니, 대체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라미로가 쯧쯧 혀를 찼다.
“그렇습니까······.”
라미로에게 들은 바로는 병사들이 받는 봉급은 예상보다 높았다.
주급 3천 페니.
5인에서 10인을 통솔하는 조장은 5천 페니.
3개 조를 관리하는 하사관은 8천 페니까지도 받는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전쟁에서의 활약 여부에 따라 추가로 포상금을 노려볼 수도 있다.
팔뚝만 한 빵 한 덩이의 시세가 100페니.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엔 충분한 액수다.
뿐만 아니라 낭비벽만 없다면 일반 병사들도 말년엔 작은 가게를 차릴 수 있는 수준이니 이만하면 충분히 목숨 걸고 싸울 만도 하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특별히 정의감 넘치는 이가 아니고서야, 그 무시무시한 하울링들과 몸소 칼을 맞댈 자는 없을 거다.
결과적으로 이 세계는 군부의 힘이 막강하리라는 추론이 자연스레 도출될 수밖에 없다.
‘사람을 학살하는 끔찍한 괴물인 동시에, 군인들에겐 없어선 안 될 애증의 존재인 셈인가.’
참으로 아이러니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전쟁은 필연적으로 군인의 존재를 부각한다.
평상시엔 칼잡이들을 싫어할지라도, 위기의 상황에서 대접받는 건 결국 그들이니까.
“그럼 난 이만 가 봐야겠다. 우리 부대장님께선 유능한 이 몸을 한시도 내버려 두지 않으시거든.”
“알겠습니다. 그럼 수고하십시오.”
라미로는 너무 애들을 괴롭히진 말아 달라는, 신참을 향한 조언과는 거리가 먼 이상한 당부를 남기고는 그 자리를 떠났다.
“휴우.”
바람이 차다.
병사들은 장비를 점검하거나 휴식을 취해야겠다며 각자 소속된 막사로 하나둘 돌아간 뒤였다.
‘참.’
서풍을 따라 흘러가는 먹구름들을 우두커니 바라보던 그는 문득 한 가지 생각에 미쳤다.
때마침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은 적잖은 정신력을 소모하는 종류의 것이었다.
‘아무도 없을 때 미리 처리해 두는 편이 좋겠지.’
도중에 누군가 말을 걸어오기라도 하면 여유가 없어질 테니까.
‘어디 보자.’
그는 눈을 감고 외부와의 교신을 끊었다.
주변의 소음이 점차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곧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무아경의 상태.
누군가 신체를 접촉하거나 말을 걸어 방해하지 않는 이상, 한동안 이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각막을 완전히 덮은 눈꺼풀 때문에 시야는 완전히 차단되어 있었다.
처음엔 어둠만이 보였다.
그러다 곧 시야 내의 풍경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다. 눈을 뜨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정확히는 눈을 뜨고 보는 광경과는 조금 다르다.
재희는 무아경의 상태에서 한 단계 더 깊숙이 가라앉았다. 그는 점점 더 깊은 심해 속으로 헤엄쳐 들어가는 중이었다.
팟.
시야가 확장되었다.
마치 확대경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기라도 하듯이. 대기 중을 떠돌아다니는 미세한 먼지알갱이마저 선명하게 보일 정도다.
‘찾았다.’
재희는 푸른빛을 은은하게 내뿜는 작은 알갱이들을 발견해 낼 수 있었다.
정민택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