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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스킬 24화

올스킬 24화
[데일리게임]


23화

그걸 증명하기라도 하듯, 불에 타다만 폐허들이 자아내는 을씨년스러운 광경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전쟁은 나라를 망치는 지름길이라고 했던가?

전쟁도 국력이 없으면 못한다.

건장한 청년들, 그들에게 주어지는 무기와 방어구와 식량까지도.

모두 다 돈이다.

그나마 대륙에서 가장 위세를 떨치는 세 왕국 정도나 되니까 가능했지, 타 왕국에서는 꿈도 못 꿀 일이다.

10년이 넘도록 전쟁이 지속되면 사람도, 나라도 피폐해진다.

이 행성의 역사는 잘 모르지만 지구에서의 지난 역사들을 돌이켜봐도 그랬다.

전쟁으로 국력이 기울고, 마침내 몰락한 국가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영원할 것만 같았던 세 왕국간의 길고 긴 전쟁이 종결된 이유는 다름 아닌 하울링의 출몰 때문이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군.’

재희는 생각했다.

인간을 뜯어먹는 하울링들 덕분에 인간들끼리의 전쟁이 종결되었으니까.

뜻밖의 공공의 적이 생긴 세 왕국은 급하게 휴정을 맺고 각자 자국 영토에 산발적으로 출몰하는 하울링들의 소탕에 나섰다고 했다.

“……그래서 지금의 상황에 이르게 된 겁니다. 사실 인간들끼리 치고 박고 싸우지만 않았다면 하울링들이 이렇게까지 활개를 치고 다니진 못했을 거라는 게 개인적인 제 생각입니다만.”

기억을 잃었다는 재희를 위해, 렌은 타바린으로 향하는 내내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그도 그렇겠군.”

재희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긴 전쟁으로 세 왕국은 상당한 군사력을 소모한 상태였다.

그런 식으로 국력을 소모하지만 않았어도 이렇게까지 하울링들에게 고전하지는 않았을 거다.

‘물론 결과는 달라지지 않겠지만.’

기생충들을 쏟아 내는 차원문은 지속적으로 등장하곤 했다.

한바탕 하울링들의 씨를 말린다 해도, 끝도 없이 재등장하는 놈들을 당해 낼 재간은 없었으리라.

“어째 으스스한데.”

브록은 저도 모르게 철퇴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이른 새벽이라 안개가 끼어서인지, 폐허들은 한층 더 음산해보였다. 바로 옆에서 유령이 나타나도 이상하지 않을 살풍경이었다.

“걱정 마. 근처에 하울링은 없는 것 같으니까.”

재희가 태연한 음성으로 그를 안심시켜 주었다.

확실히 근방엔 하울링은커녕, 작은 짐승 한 마리조차 감지되지 않았다. 정말이지 고요하다.

“그걸 조장이 어떻게 압니까? 그런데 조장님이 저런 말을 하면 이상하게 안심이 된단 말이지.”

실제로 브록의 표정은 조금 전보다 훨씬 안정적이었다.

그의 말 한 마디에 분위기가 좌지우지될 만큼 16조 내에서 재희의 영향력은 굉장히 높았다.

그만큼 조원들이 그에게 의지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벌써 꽤 친해진 모양이군.”

멀리서 렌과 대화를 나누는 재희를 바라보던 카일이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다른 건 다 좋은데 렌 저 녀석, 누구처럼 사교성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어서 내심 걱정했는데.”

라미로의 말을 들으며 카일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누구처럼’이라니. 라미로 부관. 마치 귀관을 겨냥한 말처럼 들리는데.”

“하하. 그럴 리가요! 부대장님만큼 사교성 넘치는 분이 어디 있다고!”

“라미로.”

“……죄송합니다.”

“아무튼 다행이군.”

재희를 중심으로 결속된 16조를 바라보는 카일은 만족스러워보였다.

“잠시 휴식한다.”

카일의 지시에 병사들은 그제야 짐을 풀고 한시름을 놓았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오르막 경사를 쉬지 않고 올라왔으니 지칠 법도 했다.

이제는 타바린이 정말 코앞이었다.

앞으로 반나절, 아니 그보다 일찍 8군단에 합류할 수 있으리라.

다행히 지금까지 별다른 사건은 벌어지지 않았고, 순조롭게 여기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조장님.”

다른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재희 역시 짧은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조원 하나가 그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이지?”

“어제 알려 주셨던 창법 중에 어려운 부분이 좀 있어서 말입니다.”

재희는 짬이 나는 대로 병사들에게 기본적인 훈련을 알려 주고 있었다.

물론 부대 자체에서도 꾸준히 기본 훈련을 시행하지만, 그가 알려 주는 건 병사들의 개인 기량을 향상시킬 수 있는, 좀 더 효율적인 훈련이었다.

개인 맞춤 교육이라고나 할까.

그가 동료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하는 인원은 렌과 브록 두 사람뿐이다.

안타깝지만 나머지 인원들은 그의 기대에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조원들을 나 몰라라 여길 수는 없는 법이다.

잠재력이 낮다 하더라도 체계적인 훈련 여부에 따라 충분히 훌륭한 정예 인원으로 탈바꿈시킬 수 있다.

세상에는 그 낮은 잠재력조차 다 채우지 못하고 평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니까.

다 경험과 요령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방법을 모르는 거다.

재희는 자신의 경험으로 쌓아 온 이런저런 노하우들을 병사들에게 알려 주고 있었다.

창을 다루는 자들에겐 창법을, 검을 다루는 자들에겐 검법을.

거기에 제각각인 병사들의 체형과 습관 등을 고려하여 가장 잘 어울리는 싸움법을 일일이 교육시키던 참이었다.

그렇게 많은 인원을 각자에 어울리는 방식으로 성장시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방대한 경험과 지식을 축적해 온 재희에겐 전혀 불가능하지 않았다.

“어젯밤에 제게 어울리는 기술을 알려 주셨지 않았습니까?”

병사가 제 창을 휘두르며 말했다.

“그랬지.”

재희는 귀찮아하는 기색 없이 찬찬히 그의 말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이렇게 창을 휘두르면 손목이 뻐근한 느낌이 들더라니까요? 혹시 제가 잘못 알고 있나 해서 말이죠.”

“어디 한 번 보여줘 봐.”

병사의 동작을 유심히 살펴보던 재희는 곧 잘못된 점을 캐치할 수 있었다.

“손목에 힘이 지나치게 들어갔어. 무조건 힘을 준다고 해서 위력이 늘어나는 게 아니야. 잘 보라고.”

재희는 병사의 창을 받아들더니, 직접 시범을 보이기 시작했다.

휘익.

물 흐르듯 유연한 동작. 마치 우아한 무용수를 보는 듯하다.

16조가 아닌 병사들조차도 그가 선보이는 창무를 넋 놓고 감상하기 바빴다.

창술이 아닌 일종의 행위 예술이 아닐까 생각이 들 만큼 우아하기까지 했다.

“어때?”

“허. 분명 같은 동작인데 훨씬 자연스러워 보이는군요. 그렇다고 위력이 줄어든 것 같지도 않고.”

겉보기엔 가볍게 창을 휘두른 것 같지만, 창이 허공에 가를 때 일어났던 소리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대기를 그대로 찢어 버리기라도 할 기세였다.

“창을 무기로 인식하지 말고, 네 몸의 일부라고 생각해 봐. 항상 그런 생각을 머릿속에 새겨 두면서 연습하면 훨씬 도움이 될 거야.”

“고마워요. 조장.”

그가 조원들에게 시행하는 훈련은 개인적인 것뿐만이 아니었다.

조는 언제까지나 한 팀.

특별한 명령이 있지 않은 이상, 같은 조원들은 전투 시에 항상 무리를 이루며 적을 격퇴해 나가야 한다.

이런 식의 전투에는 개인의 기량보다는 팀원 간의 호흡이 훨씬 더 중요하다.

한 명의 실력이 출중하다고 해서 멋대로 날뛰어 버리면, 남은 팀원들은 그의 공백을 메워야 한다.

한 마디로 팀 전체가 한 사람에 의해 위기에 봉착하게 되어 버리는 셈이다.

물론 재희 정도의 실력자라면 얘기가 다르지만.

그는 자신의 공백을 팀원들이 느낄 겨를도 없이 상황 자체를 끝내 버릴 수 있는 히든카드니까. 16조에서 가장 우수한 인원은 재희, 그 뒤로 렌과 브록이 뒤따른다.

재희는 렌에게 높은 자유도를 주었다.

그의 무기는 리치가 긴 창을 이용한 빠른 속공과 적진을 종횡무진 하는 날렵한 민첩성이었다.

자신과 렌이 날개처럼 좌우에서 적들에게 혼선을 주는 사이, 브록이 중앙의 빈 공백을 굳건하게 지킨다.

덩치가 크고 방어에 치중하는 브록 덕분에 두 사람은 뒤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왼쪽과 오른쪽, 그리고 중앙에서 세 사람이 중심을 잡고 적들을 몰아세우면 나머지 조원들은 후방에서 그 포위망을 두텁게 한다.

물고기를 몰아세우듯 서서히, 그리고 견고하게 고립시킨 뒤 제거해 버리는 형식의 전술이었다.

‘조원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선 이런 식으로 적을 압도해버리는 전술이 가장 효과적이지.’

속전속결.

적에게 미처 대응할 겨를조차 주지 않고 끝내 버린다.

그들의 주적인 하울링은 그리 똑똑하지 않은 녀석들이다. 놈들은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인식하기도 전에 목이 달아나버리고 말리라.

“자, 자. 다들 그만 일어나. 타바린이 눈앞에 있으니까 다들 좀 더 힘을 내자고.”

라미로가 특유의 밝은 톤의 목소리로 박수를 치며 휴식이 끝났음을 알렸다.

“음?”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찰나, 재희는 가만히 후방을 응시했다.

말발굽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온다. 다른 이들은 아직 알아차리지 못한 모양이었지만, 그는 분명히 그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라미로 부관님.”

“응? 제이. 무슨 일이야?”

“후방에서 기마대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병력의 규모는 저희와 비슷한 수준으로 사료됩니다.”

“뭐?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데.”

라미로는 그를 따라 뒤를 돌아보았지만, 시야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가뜩이나 안개에 둘러싸여 있던 터라 좀처럼 시야를 확보하기 어려웠다.

“제이의 말이 맞다.”

어리둥절해하는 라미로의 뒤에서 카일의 음성이 나지막이 들려왔다. 그는 조급해하지 않았다.

그 기마대가 적일 가능성은 없으니까.

분명 자신들처럼 타바린으로 합류하는 병력일 가능성이 높다.

“앗! 정말이었군요.”

약간의 시간이 지난 뒤에서야 비로소 라미로도 소리를 감지할 수 있었다.

하얗게 둘러싸인 안개 저 너머에서 부대의 문장이 새겨진 깃발이 언뜻언뜻 보이기 시작했다.

“저 문장은…….”

문장의 형태를 알아본 라미로의 안색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재희는 그런 라미로를 가만히 살폈다.

표정이 그리 좋지 않은 걸 보아하니, 그리 달가운 무리는 아니라고 짐작이 되었다.

그 영문을 알 수 없는 그로서는 가만히 사태를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재희는 안개 속으로 시선을 던졌다.

하늘색 바탕에 흰 그리핀이 새겨진 깃발이 클로버 보병대를 향해 접근 중이었다.

기마대 역시 보병대의 존재를 감지한 모양이었다.

철커덩. 철커덩.

기마병들이 착용한 무거운 중갑이 움직일 때마다 발생하는 육중한 소리가 여기까지 선명히 들려올 정도로 거리는 가까워졌다.

“그리핀 중기병대인가.”

기마대의 문장을 멀거니 응시하던 카일이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골칫덩이가 도착했군.”

화려한 그리핀 문양을 앞세운 중기병대는 클로버 보병대를 향해 서행해 왔다.

기병들은 하나같이 번쩍거리는 차림새였다.

수수한 가죽 갑옷으로 무장한 보병대와는 너무나도 대조적인 광경이다.

그중에서도 선두에 선 기사의 갑옷은 단연 눈에 띄었다. 곳곳마다 값비싼 보석들이 형형색색 박혀 있다.

‘전쟁을 하러 나온 건지, 갑옷 자랑을 하러 나온 건지 모르겠군.’

재희가 보기에도 그 기사는 지나치게 휘황찬란한 갑옷과 무기로 무장한 상태였다.

누가 보면 어디 대제국의 황제인줄 알겠다.

정민택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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