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기사가 푸른 깃털로 장식된 투구를 벗었다. 그러자 긴 머리카락이 좌르르 어깨 위로 쏟아져 내렸다.
특히 관리를 잘 받은 듯 우유처럼 뽀얀 피부가 인상적이었다. 기사에게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곱다.
이런 중세 시대에 저런 피부를 유지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재희는 잘 안다.
특히나 싸움을 생업으로 삼는 기사들이라면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딱 봐도 귀티가 좔좔 흐르는 귀족 자제분 같았다.
아가씨들 깨나 울려봤을 것 같은 용모지만, 기본적으로 몸에 베인 오만한 눈빛과 행동거지가 은근히 거슬린다.
중기병대를 이끌고 오는 남자의 손엔 작은 손거울이 들린 채였다.
“뭐야! 땀 때문에 눈 화장이 죄다 지워져 버렸잖아!”
그 오만한 도련님의 첫 대사는 군인에게선 찾아듣기 어려운 종류의 대사였다.
재희는 뜨악한 표정으로 남자를 관찰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기사는 제 손거울을 들여다보며 부스스 일어난 머리카락을 쓸어내리기 바빴다.
“하여간 맘에 안 든다니까, 이 상황. 하울링인지 뭔지 모를 시체들을 상대하기 위해 이런 북쪽 촌구석까지 이 몸이 직접 올라와야 한다니.”
“뭐지. 저 느끼한 녀석은…….”
“조장님! 말조심하세요! 그러다 듣겠습니다.”
“아. 내 목소리가 너무 컸나.”
정작 말을 내뱉은 재희는 심드렁한데, 브록 쪽에서 오히려 호들갑을 떨었다.
“자칫하다간 목이 날아갈 지도 모른다고요. 하긴. 조장님이 그렇게 호락호락 목을 내줄 것 같진 않지만요.”
브록의 말대로 재희가 그렇게 쉽게 당할 위인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경거망동 행동할 수는 없었다.
16조를 비롯한 부대원들이 자신 때문에 봉변을 당할 수도 있으니 일단은 조심하는 편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그리핀 중기병대는 우리와 같은 8군단 소속입니다. 저 부대장의 이름은 에셔 그레이. 검술과 기마술에도 능하고 출중한 외모 덕에 사교계에선 저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라고 합디다.”
“역시나 엄친아였군.”
어쩐지 재수 없더라. 물론 16조의 안위를 생각해서 그 말은 속으로만 읊조렸다.
“엄친…… 뭐라고요?”
“아니야. 아무것도.”
어딘 가나 엄친아들이 판치는 꼴이라니.
에셔와 마주한지 단 1분도 지나지 않았으나, 재희는 벌써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 가지 안 좋은 습성만 없었어도, 이렇게까지 악명이 자자하진 않았을 테죠.”
“안 좋은 습성?”
“저 인간, 지독한 순혈주의로 소문이 났거든요.”
순혈주의자라.
그 말을 듣는 순간 대충 감이 왔다.
“평민이라면 아주 질색을 합니다. 예전에 군단장님의 막사를 지나가다가 우연히 저 사람이 하는 말을 들었는데, 글쎄 왜 저런 비천한 평민들과 합동작전을 해야 하느냐며 군단장님께 마구 따지는 게 아닙니까? 부대원 전원이 귀족 출신인 그리핀 중기병대가 아니면 다 하찮은 족속이라는 듯이 말이죠.”
가만히 듣고 보니 저 에셔란 작자의 성격이 참으로 지랄 맞다.
한 마디로 인성 쓰레기.
‘하긴. 과거의 귀족들이란 족속들은 기본적으로 아랫것들을 무시하는 오만한마음이 기본으로 깔려 있곤 했지.’
지금까지 카일이나 라미로 같이 선량한 사람들과 알고 지내다 보니, 저런 부류의 귀족이 대다수라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그런데 한낱 부대장이 군단장님께 그렇게 무례하게 굴어도 되는 건가?”
듣고 보니 좀 그렇다.
부대장이라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그들도 군단장 휘하의 사람들이다.
철저히 계급사회로 돌아가는 군대에서 부대장 따위가 군단장에게 그런 언사를 해도 되느냐는 의미다.
“물론 안 되죠. 에셔 부대장이 위세 높은 그레이 공작가의 삼남만 아니었어도 진즉에 괘씸죄로 감방에 처박혔을 걸요.”
위세 높은 공작의 아들이라.
‘배경까지 빵빵한 녀석이라 이거지?’
점점 더 에셔가 맘에 들지 않는다.
공작이라면 왕국에서도 몇 되지 않는 권력가다.
그런 영향력 높은 집안의 아들이라면 그 위세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저 인간, 우리 부대장님을 무척 싫어하시거든요. 이번에도 보나마나 시비를 걸러 왔을 겁니다.”
“그래?”
그제야 카일이 기병대의 접근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런데 어째서? 카일 부대장님도 에셔와 같은 귀족 아닌가? 물론 공작가 만큼은 아니겠지만.”
“사실 레오나드 가문은 원래 귀족 가문이 아니었거든요. 부대장님의 부친께서 지난 전쟁에서 크게 활약하셨고, 그 공으로 작위를 하사받게 되면서 귀족의 반열에 들게 되셨죠.”
“그러니까 순수 귀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싫어한다는 건가.”
재희가 듣기엔 정말 되도 않는 이유다.
귀족이니 뭐니 하며 거들먹거리는 자들을 보고 있자면 웃기지도 않다.
“또 다른 이유가 한 가지 더 있긴 합니다.”
곁에서 브록의 얘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렌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엥? 그게 뭔데?”
브록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렌은 몇 번인가 헛기침을 하더니 곧 서두를 뗐다.
“카일 부대장님과 에셔 부대장. 두 사람 모두 킹스버리 왕립 사관학교 출신입니다. 더군다나 동기였다고 하지요. 두 분 모두 같은 기수에서 단연 두드러지는 재능을 보였다고 하더군요. 그러니 어린 나이에 실버 나이트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데다가 부대장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겠지요.”
가장 먼저 기사 작위를 받은 자들은 아이언 나이트부터 시작한다.
아직 오러를 다룰 줄 모르는 기사들은 모두 아이언 나이트라고 보면 된다.
무기에 오러를 두를 정도의 경지에 이른다면 브론즈 나이트의 자격을 얻을 수 있다.
그보다 한 단계 위인 실버 나이트는 무기뿐만 아니라 제 신체에도 자유자재로 오러를 둘러, 거기에 기반을 둔 강화된 육체를 바탕으로 고차원의 싸움에 임할 수준에 이르러야한다.
보통 실버 등급의 기사들의 평균 나이가 35세 전후임을 감안하면 아직 서른도 되지 않은 카일이나 에셔 모두 한 가닥 하는 인물들이라고 볼 수 있다.
골드는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오러를 밖으로 방출시켜 강력한 검기를 일으키는 경지.
골든 나이트는 왕국 내에서도 오십 명이 채 되지 않는 희귀자원들이다.
그 위의 로열 등급은 일국의 영웅으로 추앙받을 만한 수준.
마지막으로 나이트 마스터.
100년에 한 명 꼴로 나타난다는 보기 드문 인재들.
현재 마스터에 등극한 자들은 대륙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레지스 왕국의 역사에서도 마스터는 지금껏 고작 다섯 명이 존재했었다고 하니 이만하면 말 다했다.
둘 이상의 나이트 마스터가 한마음으로 뭉친다면 대륙의 판도를 뒤집을 정도.
이만하면 그들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존재인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궁극의 깨달음을 얻은 자들.
그들은 그야말로 자신이 검 그 자체이다.
“소문에 의하면 작년에 사관학교를 졸업한 카일 부대장님은 만년수석이셨답니다.”
“우리 부대장님이 그렇게 잘나가는 분이셨단 말이야? 유능하신 분이라는 건 진작 알고 있었지만, 정말 굉장한걸.”
브록이 놀랐는지 혀를 내둘렀다.
“문제는 여기서부터야.”
렌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도둑고양이처럼 조심스러운 태도로 허리를 굽혔다.
“뭐야?”
“뭔데 그래?”
덕분에 재희와 브록도 거기에 눈높이를 맞추는 수밖에 없었다.
“에셔 부대장은 만년차석이었다고 하더군요.”
“허.”
그야말로 엄청난 앙숙.
아니, 앙숙이라는 단어로는 부족하다. 에셔의 입장에서 카일은 철천지원수나 다름이 없지 않은가?
“오. 이게 누구야? 카일 부대장님 아니신가?”
바로 지척에서 들려온 말소리에 세 사람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재빨리 자세를 바로 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에셔였다.
그의 입가엔 작위적인 미소가 만연했다.
순수하게 반가운 마음으로 인사를 건넸다고 보기엔, 카일을 향한 에셔의 눈빛이 그리 달가워 보이지 않았다.
상대를 업신여기는 오만함이 기본으로 깔린 표정.
맘 같아선 그 얼굴에 주먹을 먹여주고 싶을 정도다.
재희만 그런 생각을 떠올린 게 아니었는지, 브록과 렌 또한 표정이 그리 좋지 못했다.
“저런. 몰골이 말이 아니네. 카일 부대장.”
번쩍이는 갑옷으로 온 몸을 무장한 에셔에 비해, 카일의 무장은 초라해 보이기까지 했다.
물론 일반 병사들보다야 상태가 양호했지만, 카일의 갑옷은 멋보단 실용성에 중점을 두었다.
번쩍거리기는커녕 잦은 전투로 인해, 핏자국이 문신처럼 새겨졌다.
에셔와 같은 귀족이라고는 보기 어려울 만큼 두 사람의 차이가 확연했다.
“모처럼 재회의 악수라도 나누고 싶다만…….”
피로 얼룩진 카일의 갑옷을 쳐다보며 에셔는 눈을 찌푸렸다.
“네게서 천박한 악취가 나거든. 내가 좀 비위가 약해서 말이야. 이해해 줄 거지?”
브록의 미간이 구겨졌다.
자신이 따르는 부대장이 타인에게 심한 모욕을 당하는 장면을 보고도 기분이 좋을 턱이 없다.
“언제 봐도 유치하구나. 에셔.”
그런 모욕을 들었음에도 카일은 무덤덤하니 응수했다. 에셔가 무슨 모욕을 주던 관심 없다는 듯이.
“너야말로 사교성 없는 건 여전하네. 가문이 미천하면 살랑살랑 꼬리라도 잘 흔들었어야지. 그러니까 이딴 쓰레기 같은 부대나 이끌고 있는 거야.”
“방금 뭐라고 했나?”
카일의 인내심도 거기까지였다. 자신은 몰라도 부하들까지 모욕당하는 것만큼은 참을 수 없었다.
“왜. 무슨 불만이라도 있어? 쓰레기더러 쓰레기라고 불렀을 뿐인데.”
그 모습을 본 에셔가 득달같이 그를 한층 더 자극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카일에겐 전혀 득될 일이 없는 상황이다.
에셔와 불화라도 생겼다간 피해를 입는 건 카일 자신뿐만이 아니게 될 테니까.
자칫하다간 가문 싸움으로 번질 수도 있다.
공작가를 상대로 싸움을 벌이는 건 미친 짓이다.
에셔도 그 점을 이용해 일부러 카일의 성질을 돋우려는 의도로 보였다.
보아하니 눈엣가시 같은 녀석을 이참에 아예 가문 통째로 매장해버리겠다는 심산이다.
“카일님.”
보다 못한 라미로가 은근한 목소리로 카일을 불렀다. 근처에 에셔가 있어서인지 한층 조심스러운 기색이었다.
라미로는 그를 부른 이후로 말 한 마디 꺼내지 않았으나, 카일은 라미로의 의중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알겠다.”
카일은 잠시 이성을 잃었던 자신을 속으로 질책하며 화를 가라앉혔다.
“네놈은 뭔데 감히 끼어드는 거냐?”
에셔는 다 된 밥에 재를 뿌린 라미로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죄송합니다.”
라미로는 얼른 고개를 조아렸다.
에셔는 그런 라미로가 무척이나 못마땅했으나, 딱히 질책할 명목이 없어 그저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
라미로가 속한 에들렌 가문은 그레이 공작가 만큼은 아니어도, 왕국에서 위상이 높은 편에 속하는 가문이었다.
공작도 아닌 자신이 멋대로 문제를 크게 만들어 낼 만큼 만만한 가문은 아니다.
“가자.”
흥이 식었다.
못마땅하다는 눈빛으로 좌중을 돌아보던 에셔는 곧 제 기병대를 이끌고 먼저 자리를 뜨고 말았다.
언제나 인간들의 사회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건 같은 인간이다.
‘영 좋지 않은 예감이 드는군.’
뿌연 흙먼지를 남긴 채, 멀어져가는 그리핀 중기병대를 바라보던 재희는 깊은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정민택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