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신진섭 게임칼럼니스트]
#'리그오브레전드' 랭크게임을 즐기던 직장인 A씨는 미드라인에서 상대편과 영혼의 '막고라(1대1 대전)'를 뜨던 중 백발백중인 적 제라스의 스킬샷에 화가 나 마우스를 벽에 던지고 게임을 삭제하고 말았다.
#'배틀그라운드'에서 낙하산을 펼치고 에란겔에 착륙해 열심히 파밍하던 대학생 B씨. 보급까지 먹어 좋아하던 B씨는 체력 아이템을 찾으러 건물에 들어갔다가 벽을 뚫고 들어온 총알에 의문사 했다.
#'오버워치' 다이아 등급인 C씨는 게임을 하다 우리편에게 분노를 느끼기 시작했다. 무빙이나 '샷빨'이 실버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실력에 이상한 낌새를 느낀 C씨는 전적을 뒤져보기 시작했다. 아뿔싸, 지난주까지 자리아 윈스턴이 주캐였던 이용자가 오늘은 맥크리로 공중에 총질을 하고 있었다.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A, B, C가 분노조절장일까요. 아니면 인내심이 '개복치급'인 이용자들일까요. 그런 얘기가 아니란 걸 게임 좀 해 본 이들이라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네. 오늘 해 볼 얘기는 바로 게임 내 불법프로그램인 '핵'과 점수 또는 등급을 대신 올려주는 '대리랭(크)' 문제입니다.
핵과 대리랭은 요즘 잘나가는 온라인이 피해나갈 수 없는 홍역과 같습니다. 특히 FPS(총싸움)나 MOBA(적진점령) 장르 게임에서 문제가 심각합니다. 앞서 예로 든 게임들 모두 대단한 인기를 구가했지만 핵과 대리랭 문제로 게임에 큰 위기가 찾아온 적이 있습니다.
문제적 이용자들이 사람들을 더 화나게 하는 건 생각보다 당당하다는 겁니다. "나만 재밌으면 돼지", "그래서 어쩌라고?", "꼬우면 너도 써", "그래서 님한테 내가 뭐라도 했음?" 필자가 실제로 다 들어본 말입니다.
이들의 후안무치함에 화가 나면서도, 분명히 잘못된 건 알겠는데 정확히 뭐라고 반박해야 할 말을 찾지 못해서 짜증났던 경험 다들 있으실 겁니다. 사회과학의 고전인 '사회계약론'을 바탕으로 이들의 잘못이 왜 잘못됐는지 정리해보겠습니다.
◆치트오매틱은 되는데 헬퍼는 안 되는 이유
패키지 게임시절에도 핵 이용자들은 있었습니다. 치트-오매틱으로 대표되는 에디터로 게임 내 데이터를 변조하는 일은 흔했습니다. 하지만 이때는 이용자는 물론 개발사도 불법 프로그램 사용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개인의 플레이가 타인에게 영향을 끼치지 않았기 때문이죠. 불법 프로그램을 써서 10시간짜리 게임을 5분 만에 클리어 한다고 해서 다른 이용자가 불쾌감을 느낄 일은 없습니다. 규칙 훼손에 대한 대가는 오로지 핵 이용자에게 국한됩니다.
하지만 온라인게임은 다릅니다. 각자의 행동이 적건 크건 타인에게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게임이 사회성을 띄게 되는 지점입니다.
'디아블로2'의 '조던링' 복사 사건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획득 난이도가 높았던 고급 아이템인 조던링이 버그 악용 이용자로 인해 시장에 마구잡이 풀려나갑니다. 이용자들은 기뻐했습니다. 누구나 고급 아이템을 착용할 수 있는 세상이 열린 거죠. 사냥도 더 쉬워졌습니다. 아이템 복사가 나쁠 게 없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만약 본인이 이미 조던링을 갖고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분노했을 겁니다. 재화의 가치가 폭락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조던링을 갖기 위해선 얼마만큼의 노력과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는 게임의 기본 규칙 자체가 붕괴합니다. 더 이상 조던링은 선망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높아진 평균 스펙 때문에 게임전체의 레벨링(난이도 설계)이 훼손돼 콘텐츠 고갈 속도가 빨라집니다.
◆유저는 유저에게 있어서 늑대다
영국의 철학자이자 정치학자 홉스는 이렇게 개개인이 규칙 없이 살아가는 상황을 자연 상태라고 규정하고 이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말은 원래는 라틴어로 쓰인 '시민론'의 서두에 나온 말입니다. '사람은 사람에게 있어서 늑대다(homo homni lupus)'라는 문장과 같이 적혀 있었습니다.
조던링 복사 사건은 인간사회에서도 이미 여러 번 반복됐습니다. 뗀석기로, 활로, 또 조개 껍데기로 인간은 타인보다 우월하기 위해 남이 가진 가치를 훼손했습니다. 이런 사회는 발전하기 어렵습니다. 어떻게든 서로를 뜯어먹기 위해 눈치를 보다가 진보는 꿈도 못 꾸게 되죠. 힘센 놈이 우리 집을 침략할까 겁이 나니 울타리를 짓는데 온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서로간의 약속이 근간이 되는 상업은 물론 농업도 발전하기 어렵죠.
게임도 마찬가지 과정을 겪습니다. 어차피 노력을 쏟아부어도 핵을 만나면 모두 물거품이 될 게 분명합니다. 실력을 키우거나 파밍을 할 이유가 사라집니다. 정당하게 플레이했던 이용자들은 '현자타임'을 느껴 하나 둘 게임을 접습니다. 개발사는 핵을 막느라 게임 개발에 쓸 자원을 사용하게 됩니다. 업데이트는 지체되고 서버 관리에도 허점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점수의 가치를 갉아먹는 대리행위
대리랭은 어떨까요. 불법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것도 아니고 점수 좀 올린 게 무슨 피해가 되겠냐고 생각하는 이들도 분명 있을 겁니다. '어차피 랜덤매칭이니까 아군과 적군에 대리랭이 있을 확률은 동일하다. 그러니까 피해주는 게 없다'는 궤변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리랭도 마찬가지입니다. 규칙을 무시하고 결과적으로 전체 게임의 생명을 갉아먹죠. 설령 대리기사와 직접 게임을 같이 하지 않아도 말입니다.
대리랭이 늘어날수록 랭크(순위)가 지닌 가치가 하락하게 됩니다. 대리랭이 퍼지기 전 '리그오브레전드'에서의 다이아몬드 등급과 그 이후의 다이아몬드의 가치는 분명 다릅니다. 그 전까지는 실력 100%의 척도로 측정됐지만 대리랭 문제가 이후에는 '너도 어차피 대리랭'이라는 인식이 암처럼 퍼져 나갔습니다. '뭐하러 노력을 해. 대리로 올리면 되지'라는 생각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랭크가 올라도 예전만큼의 성취감을 느낄 수가 없게 됩니다. 승리의 기쁨을 대리랭이 앗아가는 겁니다.
대리랭과 핵 문제를 관통하는 사유는 '공정함'입니다. 게임의 정의는 다양하지만 빼놓지 않고 언급되는 건 바로 '규칙'입니다. 그래픽이 없던 옛날 하이텔 시절 텍스트 게임도 게임의 범주로 포함시킬 수 있는 건 이용자가 동등한 규칙을 적용받았다는 이유 때문일 겁니다.
◆당근과 채찍, 가상사회의 적을 잡는 방법들
게임에 가입할 때 우리는 가상 사회의 시민권을 부여받고 약관에 동의하는 방식으로 공공의 선을 지켜나갈 것을 약속합니다. 이는 서로가 동등한 출발선에서 공정한 경쟁을 펼치겠다는 의미입니다. 사회계약을 체결한 셈이죠. 그래서 우리는 핵과 대리랭에 분노하게 됩니다. 공공선을 파괴하고 유무형의 자산을 약탈해 가상사회를 붕괴시킵니다.
뭐 이렇게까지 말을 해도 문제적 이용자들은 알아듣지 못할 공산이 큽니다. 그래서 이들을 다루는 당근과 채찍은 더 강력해지고 있습니다.
MOBA게임 '도타2'에는 게임을 망가트리는 '트롤'들을 가두는 트롤촌이 있습니다. 일정 판을 해야 다시 일반 이용자들과 매칭이 가능해집니다. 트롤촌은 생지옥이나 다름없습니다. 문제아(?)들만 모아놓은 판에 정상적인 게임 진행이 극도로 어렵습니다.
'리그오브레전드'는 매너 플레이를 거듭하는 이용자들에게 특별한 아이템을 지급하는 당근 정책으로 효과를 봤습니다. 공공 선을 지킨 사람에게 부여하는 훈장을 주는 것인데, 실제 게임을 해보면 매너 플레이 아이템은 뛰어난 실력 못지않게 다른 이들의 관심을 받습니다.
핵이나 대리랭 유저의 게임 플레이 자체를 막는 것은 궁극적인 해결책이 되기 어렵습니다. FPS나 MOBA는 장기간 캐릭터를 육성해야 하는 RPG(역할수행게임)와는 달리 게임 접속이 막혀도 잃을 게 별로 없거든요. 이들은 아이디나 계정을 새로 파서 게임이 망하거나 질릴 때까지 같은 짓을 반복합니다.
본인들도 다른 사람들이 느끼는 고통을 체감해 반면교사로 삼기에는 트롤촌이 더 낫다 싶습니다. 결국에 핵이나 대리랭이 우월감을 느끼고 싶은 마음에서 생겨난다는 걸 생각하면 매너 플레이에 대한 보상도 훌륭한 해결책으로 보입니다.
지난해 6월부턴 '대리게임 금지법'이 시행됐습니다. 돈을 받고 점수를 대신 올려주면 2년 이하 징역 2000만 원 이하의 벌금을 받게 됩니다. 대리랭을 뛰는 사람을 발견한다면 다가가 조그맣게 속삭이세요. "인생은 실전이야 이 XX아!"
정리=이원희 기자(cleanrap@dailygam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