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 0. 빛의 길
깨달음은 일순간에 찾아온다. 그리고 어떤 때에 그것은 극적으로 자신을 바꿀 수도 있다.
라크는 오늘 아침 잠에서 깨어나 통나무집의 덧창을 열었을 때, 그것을 알 수 있었다.
새벽에 내린 이슬이 열린 덧창을 타고 흘러 태양빛과 함께 떨어졌다. 그리고 그것은 여린 수풀에 부딪쳐 그들이 머금은 빛과 함께 찬란하게 파괴되어 버렸다.
그 순간 라크의 머릿속에서도 파괴가 일어났다. 기존에 막혀있던 모든 것이 뚫리고 단번에 그의 감각기관에 새로운 자극을 추가할 정도의 커다란 파괴였다.
창문을 통해 아침 햇살이 들어와 밤새 어둠속에 머물렀던 그의 피부를 자극했다. 그것은 아주 세밀한 바늘들로 콕콕 찌르는 듯한 느낌이었는데, 곧 형언할 수 없는 쾌감으로 바뀌어 전신으로 스며들었다.
“세상은 빛으로 가득 차 있었나?”
라크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이곳에 와서 수련에 몰두를 한지 벌써 3년이 흘렀다. 아직 어린 소년이었던 라크가 스스로의 의지로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은 그의 주변을 둘러싼 시샘과 멸시의 눈빛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하찮은 일들은 모두 라크의 가슴속에서 사라졌다. 다른 마법사들에 관한 일들은 지금 생각하면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들이었다. 중요한 것은 오직 하다. 그의 심장에 모이고 있는 빛들이었다.
“씻어야겠군.”
한참을 멍하니 서 있던 라크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중얼거렸다. 오랜 수련 생활의 외로움이 그에게 만들어 준 버릇 중 하나였다. 스스로 말하고 그것을 귀로 들으며 의미를 확인했다.
스승인 라시트는 그런 라크의 버릇을 발견하고는 웃으며 말했다.
“그건 언령의 수련법이다. 네가 하기에는 아직 경험과 마력이 약하구나.”
그때 라크는 10살이었고, 아직 가장 간단한 마법도 쓸 수 없던 시기였다. 스승이 웃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그것은 수련이 아닌 버릇이었고 어린 라크는 언령이란 단어 자체를 몰랐기에 그저 머리를 긁적이며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라크는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고는 피식 하고 웃었다.
“이제는 정말로 수련이 될지도 모르지요. 사부님.”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침대 옆에 걸려있는 수건을 들었다. 그리고 통나무집을 나섰다.
-파하
손을 들어 개울의 물을 퍼서 얼굴을 씻으니 시원함이 얼굴을 통해 전신으로 퍼졌다. 물이 스며 들어오지 못하게 가늘게 뜬 눈에 물방울로 인해 일그러진 세상이 보였다.
그것은 거꾸로 뒤집힌 세상이었고 라크가 있는 이곳과 또 다른 장소였다.
“정말로 재미있어. 마치 날아다니는 새가 된 것 같잖아.”
어제까지 무심하게 지나쳤던 모든 것이 오늘은 마법의 의미를 띠고 라크에게 다가왔다.
숲속에서 나뭇가지 사이를 오가며 먹이를 찾던 다람쥐가 갑자기 매가 되어 높은 하늘을 자유롭게 나는 것과 같았다. 발을 디딜 가지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던 눈이 이제는 숲 전체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이제는 수련을 하다가 주문의 이치를 이해하지 못해 막히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가슴 가득히 들이차는 빛과 함께 자신감이 생겨났다.
얼굴을 씻고, 다시 머리에 물을 적셔 잘 정돈한 뒤에 낡은 끈으로 질끈 동여매었다. 그동안 한 번도 깎지 않은 머리인지라 거의 어깨 아래까지 자라있었다.
몇 차례 크게 심호흡을 해서 가장 신선한 아침 공기를 들이마신 라크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맑고 푸른 바다와 같은 하늘에 눈이 시렸다. 그리고 그 끝에 연결된 지표면 너머에 있는 자신의 고향을 생각했다.
고향이란 다름 아닌 현자의 탑이다. 그곳에서 태어났는지는 모르겠는데, 철들기 이전부터 기억나는 곳이 탑이었으니 결국 그가 느끼는 고향은 현자의 탑일 수밖에 없었다.
“돌아갈까?”
주어진 숙제는 끝낸 셈이다. 이제는 그 누구 앞에서도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나는 라시트의 제자다! 한 사람의 마법사다!
그러나 라크는 곧 고개를 저었다.
“깨달음을 얻은 것과 그것을 몸 안에 받아들이는 것은 다른 행위이다. 이제부터가 진정한 수련이 되겠지.”
스스로 한말이 귀를 통해 들어와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것은 곧 굳은 결심으로 변해 이 지겨운 수행을 계속하도록 명했다.
라크는 몸을 돌려 통나무집으로 돌아가려 했다. 정리를 하고 폭포 아래의 바위위로 가서 명상을 하면서 오전을 보내야 한다.
그러나 라크는 곧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건너편 봉우리를 보았다.
마나의 파동이 그에게 다른 마나의 접근을 알렸다. 그다지 강하지는 않은 마나의 기운, 그것은 마법사의 존재를 의미했다.
과연 얼마 후에 봉우리 너머로 한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는 봉우리를 넘자마자 라크를 발견한 듯 곧바로 그를 향해 달려왔다.
계곡을 내려가 다시 이쪽 봉우리까지 일직선으로 달리는 그자는 정말로 평야를 달리는 야생마와도 같이 빨랐다. 숲에서도 나무와 풀의 방해를 받지 않고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마법을 시전 한 것이 틀림없다.
라크는 조용히 서서 그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노란 로브를 입은 마법사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라크의 앞에 멈춰 섰다.
“저는 현자의 탑 소속 마법사 제논이라고 합니다. 라칼리오 지부라스 님이십니까?”
“그렇습니다.”
라크는 그렇게 말하며 현자의 탑 마법사의 징표를 내밀었다. 확실히 거기에는 라크의 정식 이름이 쓰여 있었다.
그러자 제논은 겨우 찾았다는 듯 깊게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탑의 전갈을 가져 왔습니다. 라시타 님께서 위급하십니다.”
“스승님이!”
그 말을 들은 라크의 눈이 격하게 흔들렸다. 호수와도 같이 깊은 아쿠아마린색의 눈동자는 소용돌이처럼 감정을 분출했다. 가장 소중한 사람, 라크에게 있어서 그건 바로 스승인 라시타였다.
* * *
가이안 제국의 수도 스틸문에서 가장 높은 건물은 바로 7개의 상아빛 원형탑이다. 그것이 바로 모든 마법사들의 고향이라고 불리는 현자의 탑이다.
레오는 산을 내려와 제논과 함께 일주일을 꼬박 달려 그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무리 몸무게를 가볍게 하고, 체력을 증강시켰다고는 해도 역시 거의 하루 종일 계속 달리는 것은 인간이 할 짓이 못된다.
현자의 탑에 도착할 무렵, 제논의 노란색 로브는 먼지로 인해 회색빛을 띠기 시작했고, 라크의 로브는 더욱 진한 회색이 되었다.
그래도 그 덕분에 그들은 정말로 빠르게 현자의 탑에 올 수 있었다. 라크는 탑에 돌아오자마자 옷도 갈아입지 않고 라시타가 있는 진화의 탑으로 향했다. 제논도 함께였다.
그곳은 이미 3년 전과는 다르게 바뀌어 있었다. 연구를 할 수 있는 시설은 거의 사라지고 가능한 한 넓은 공간을 확보하려는 듯 비워져 있었다.
아마 대마법사 라시타는 오래전부터 병으로 거의 활동을 못한 것 같았다. 어쩌면 라크가 떠난 바로 직후부터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서 있었는데, 그들 대부분은 마법사의 로브를 입고 있었다.
-꿀꺽
제논은 분위기에 압도되어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그의 눈에 보이는 사람들 중 고위마법사의 로브를 입은 자만해도 여럿이 있었다. 중견마법사인 그라고 해도 한 달에 한번 볼까 말까한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모두 진중한 표정으로 서 있다. 감히 소리를 내어 숨을 쉴 수도 없을 정도의 위압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라크는 문 안으로 들어가자 나직한 목소리지만 당당하게 외쳤다.
“라크입니다. 스승님을 뵈러 왔습니다.”
순간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라크에게 쏠렸다. 여러 가지 감정을 담은 눈빛이 라크의 피부를 자극했다. 하지만 라크는 그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천천히 방안을 살폈다.
앞쪽으로 하나의 침대가 보였다. 그리고 침대 옆에는 몇 사람의 마법사와 한명의 치유신관이 서 있었다.
아마 그 침대에는 라시타가 누워있을 것이다. 라크는 주변에는 조금도 눈 돌리지 않고 그쪽으로 걸어갔다.
침대에 다가갈수록 마법사들의 몸에서 느껴지는 마나의 힘이 강했다. 이 자리에 서 있는 것도 엄격한 서열에 의해 순서가 있는 것이다.
침대의 가까이 다가갔을 때에는 이미 주변에 일반 마법사는 하나도 없고, 대신에 현자의 탑 소속의 고위마법사 7명이 모두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약간 뒤쪽으로 고위마법사들의 후계자들로 내정된 젊은 마법사들이 서 있었다.
대부분 라크를 경멸하고 또 싫어하는 자들이었다. 재능도 없는 그가 당대 최고의 대마법사의 유일한 제자가 되었다는 것에 대한 질투가 강하게 느껴졌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확실히 라크 스스로도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저들의 질시와 미움은 그 커다란 행운에 대한 부록이다.
“라크...”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 하지만 분명히 옆에서 누군가가 라크의 이름을 불렀다.
라크는 그 목소리를 분명히 들었지만 눈동자도 돌리지 않고 그대로 앞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누가 자신을 불렀는지는 알고 있었다.
시르카, 그녀는 라크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 스승의 최후를 보아야 하는 그를 위로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이 엄숙한 자리에서도 용기를 내어 이름을 부른 것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주변에 있던 젊은 마법사들의 눈빛이 더욱 사나워졌다.
엘프의 피를 이은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아름다운 시르카는 대부분의 마법사들의 호감을 받고 있다. 특히 그녀와 비슷한 나이의 남자들은 거의 틀림없이 호감 이상의 감정을 가지고 있다.
그런 시르카가 웬일인지 라크를 좋아한다. 다른 사람들이 라크를 놀릴 때, 그녀는 말했다.
“마법사의 자질을 평가할 때에는 현재 이루어진 마법의 성취보다는 성격과 행동을 보는 것이 옳아. 라크 넌 훌륭한 마법사가 될 거야.”
11살밖에 안 됐을 때의 일이다. 시르카는 라크보다 두 살 위인 13세였는데, 그 뒤로 시르카는 라크에게 있어 상냥한 누나가 되었다. 그래서 시르카는 스승인 라시타 다음으로 라크가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다.
시르카가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도 그런 것은 아니다. 시르카야말로 마법에 미쳤다고 할 정도로 다른 일에 무관심한 성격이었는데, 라크만 예외가 된 것이다. 그녀 역시 라크가 얼마나 고생을 하는지는 몰랐지만 라크의 재능을 알아볼 수는 있었고, 그것에 끌린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당연히 라크는 그때부터 다른 마법사들에게 노골적인 괴롭힘을 당했다. 놀랍게도 라시타의 제자가 되었을 때 따라온 부록보다 그녀의 호감을 받게 되면서 따라온 부록이 더 컸다.
‘염라 마, 시르카. 난 괜찮아.’
라크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마침내 침대 앞에 가서 그곳에 누운 사람을 보았다.
“스승님, 제가 왔습니다.”
라크는 그렇게 말하고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깡마른 라시타의 손을 잡았다.
정말로 뼈와 가죽밖에 남지 않은 손이었다. 그 위에 차갑게 식어 손끝이 파랗게 변한 상태였다. 하지만 이 손이 허공중에 룬의 문양을 그리면 기적과도 같은 힘이 생겨난다.
라크는 자신의 두 손으로 스승의 손가락을 잡에 온기를 전했다.
그러자 라시타가 조용히 눈을 떴다. 손끝에 느껴지는 온기에 정신을 차린 것이다. 그는 침대의 천정에 있는 문양을 보았다. 마법적인 룬어로 만들어진 문양으로 대상의 활력을 강하게 하는 작용을 하는 문양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라시타에게는 거의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육체의 한계에 달해 생명력이 모두 고갈된 상태이기 때문에 더 이상은 강화될 활력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살아있다. 라시타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억지로 고개를 돌려 옆을 보며 말했다.
“라크냐?”
“그렇습니다.”
라크는 조용히 대답했다. 그러자 라시타는 희미하게 웃었다. 제자의 성격을 잘 아는 라시타였다.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다면 결코 산을 내려오지 않았을 것이다.
“보여다오.”
“알겠습니다.”
라크는 대답을 하며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는 손바닥을 위로 하고 마나를 끌어올렸다.
-팍
곧 작은 불덩어리가 손바닥 위에 생겨났다. 가장 쉬운 주문 중 하나인 플레임 볼트였다. 불덩어리를 생성시켜 상대에게 던지는 마법으로 매직 미사일과 함께 견습마법사가 가장 먼저 배우는 공격형 마법이다.
단지 따로 주문을 외우지 않고 시전 할 수 있다는 것이 조금 봐줄만 하지만 지금 이 방에 있는 마법사 중에 그 정도에 놀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김운영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