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히려 몇몇 마법사들은 경멸의 눈으로 라크를 보았다.
‘어떻게 그 정도 수준의 마법을 다른 사람들 앞에서 보일 수 있지? 대마법사의 제자로서 창피하지도 않은가?’
그들은 대부분 그렇게 생각했다. 라크의 몸에서 느껴지는 마나의 힘은 약 2서클, 견습을 겨우 벗어난 하급의 마법사 수준에 불과했다.
아무리 16세의 나이라고는 해도 대마법사의 유일한 제자가 그렇다는 것은 문제가 크다. 현자의 탑의 체면에 관계된 문제였다.
역시 소문대로 라크는 ‘라시타의 비보’에 불과하단 말인가? 늙은 라시타가 자기의 시중을 들게 하기 위해 들인 재능 없는 제자, 세상에 내 놓을 수 없을 정도로 멍청해서 숨겨진 보물이 되었다는 것이 사실인가? 몇몇 고위마법사들도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라크의 손바닥 위에 떠 있는 불덩어리에 변화가 일어났다.
-사사사사사사
붉게 타오르는 불꽃이 점점 하얗게 바뀌었다. 그리고 그것은 조금씩 부풀어 오르며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그와 동시에 불덩어리에서 느껴지는 마나의 힘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아니! 저것은!”
고위마법사 중 법의 수호자의 칭호를 가진 린도르가 놀란 얼굴로 외쳤다. 그는 라크의 손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짐작을 할 수 있었다.
정령의 자매 타라스티도 긴장하여 자신이 제자인 시르카의 손을 잡았다. 서클을 벗어난 상위마법계열 중 정령마법의 전승자인 그녀 역시 머릿속에 떠오른 하나의 생각에 침을 삼켰다.
하지만 다른 마법사들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단지 한번 시전 된 마법이 도중에 변화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마법학에서는 아주 기초적인 상식이 깨어지는 것에 놀랄 뿐이었다.
이윽고 라크의 손위에 떠 있는 플레임 볼트는 완전히 모양을 바꿨다.
그것은 사람 머리모양만한 크기의 빛 덩어리였다. 사방을 밝게 비추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느낌의 빛! 하지만 그 안에서 느껴지는 마나의 힘은 결코 1서클의 것이 아니었다. 최소한 3서클의 파이어볼 수준은 되었다.
“어떻게 된 거요?”
고위 마법사 중 한명인 달라스가 조심스럽게 린도르에게 물었다.
라크의 몸에서 느껴지는 마나는 겨우 2서클 수준에 불과한데 그가 구현한 마법이 3서클이라니?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달라스는 고위마법사의 자존심도 버리고 린도르에게 가르침을 청한 것이다.
하지만 린도르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 한손가락을 입 앞에 대었다. 조용히 하라는 소리다.
“으음.”
달라스는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다시 라크를 보았다. 기껏 물었는데 대답을 해주지 않는 동료에게 불쾌함을 느꼈지만 이미 그걸로 화낼 나이는 지났다.
그리고 해답은 언제나 가까이 있는 법. 라크가 문제를 낸 샘이니 그에게 직접 답을 듣는 것이 옳다.
한편 그 광경을 똑똑히 지켜본 라시타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생의 마지막 경계선에서 드디어 평생 원하던 결과물을 확인하게 되었다.
대마녀 티모라가 마지막으로 인간에게 전한 상위마법이론. 그것이 드디어 현실화 되었다. 드래곤도 마족도 사용할 수 없는 인간만의 마법! 최후의 상위마법!
그것을 위해서는 특별한 재능을 가진 아이가 필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힘든 수련이 동반된다. 뜻을 이룰 때까지 돌아오는 것이 거의 없는 가혹한 수련! 그것을 그의 제자는 해 내었다.
라시타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어 라크의 다른 한 손을 잡았다.
최후의 힘을 짜내어 들어 올린 손은 쉬지 않고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새 파랗게 식어 있었던 손가락이 열기로 인해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너는...”
라시타는 라크를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모든 사람이 라시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현자의 탑이 처음으로 탄생시킨 빛의 마법사다.”
그 말과 함께 라시타의 손이 힘없이 툭 하고 침대위로 떨어졌다.
“스승님!”
-팍
라크가 놀라 라시타를 부르자 그의 손에 있던 빛의 구슬이 사라졌다. 집중력이 깨어지면서 마법이 해체되었다. 하지만 라크에게 지금 중요한 것은 바로 스승인 라시타의 상태였다.
옆에 서 있던 치유신관이 얼른 라시타의 상태를 살폈다. 그러나 곧 그는 슬픈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스승님!”
라크는 다시 라시타를 불렀다. 그러면서 두 손으로 스승의 손을 잡았다. 아직은 따뜻한 기운이 식지 않은 손이다. 하지만 그곳에서 피의 흐름과 심장의 박동은 느껴지지 않았다.
“스승님!”
결국 라크는 라시타의 몸을 잡고 울었다. 세상에서 가장 가까웠던 사람이 지금 영혼으로 돌아갔다. 알고 보니 라시타는 지금까지 라크의 성취를 보기 위해 억지로 생명을 이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라크...”
시르카가 조용히 다가와 울고 있는 라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하지만 라크는 여전히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사람들은 숙연한 분위기속에 당대 최고의 대마법사의 최후에 애도할 뿐이었다.
그날, 현자의 탑은 정식으로 세상에 현자의 탑의 수장이자 진화의 탑의 주인인 라시타의 죽음을 발표했다. 그리고 새로운 상위마법인 빛의 학파의 전승자로써 라크를 인정했다.
빛의 길, 그것이 바로 라크가 어렸을 때부터 걸어온 길이고 앞으로도 걸어야 하는 길이다.
마법사라면 개인감정을 떠나 새로운 상위마법을 연 사람을 존경할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라크를 멸시하고 조롱했던 모든 사람들은 이제 존경과 경외의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라크는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역시 주변 사람들의 시선보다는 가슴속에 느껴지는 마나와 빛의 힘에 집중할 뿐이었다.
사실 새로운 문을 연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 그의 수준은 높지 않았다.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라크는 조금도 쉬지 않고 수련에 수련을 거듭했다. 그리고 그만큼 성장했다.
그러는 동안 세월은 계속해서 흘러갔다. 소년이 청년이 되고, 마침내 다른 고위마법사들과 대등한 위치에 설 때까지.
Chap 1. 라크를 찾는 라크
화창한 봄날의 날씨는 멀쩡한 사람도 졸리게 만든다. 도리스는 점심을 먹고 난 후 접수대에 앉아 업무를 보다가 점점 눈꺼풀이 무거워 지는 것을 느꼈다.
오늘따라 접수를 받으러 오는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본능이 시키는 대로 과감하게 졸기로 했다.
그런데 막상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으니 앞쪽에서 딸랑딸랑하는 방울소리가 들려왔다. 문이 열리고 사람이 들어온 것이다.
‘으윽, 누구지? 눈치도 없이. 30분만 있다가 오란 말이야!’
도리스는 속으로 그렇게 외쳤지만 그걸 입 밖으로 냈다가는 별로 좋은 꼴을 보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곳은 용병길드, 찾아오는 손님들은 용병을 고용하려는 자들이나 용병이다.
용병 중에는 성질이 급한 자도 많기 때문에 일단 화가 나면 눈앞에서 칼을 뽑아 빙빙 돌리거나 아예 목에 바짝 대고 으르렁 거리는 자도 있다.
그렇기에 도리스는 이 직업을 가지고는 표리부동의 접대술에 적지 않은 수련을 쌓았다. 그는 즉시 고개를 들어 내가 언제 졸았냐는 듯 미소를 지었다.
“어서 오십시오. 타렌의 용병길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매뉴얼대로 정해진 인사를 하면서 도리스는 들어온 자의 인상과 복장을 살폈다.
접수요원의 기본은 안목이다. 가끔씩 현상 붙은 자가 오거나 수상한 무기를 들고 있는 자도 오는데, 그럴 때에는 지체 없이 몸을 피하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다행이도 이번에는 제대로 된 손님인 모양이다. 들어온 사람은 검은 머리카락을 뒤로 묵어서 길게 늘어뜨린 청년이었다.
입고 있는 회색의 로브는 그다지 주목받지 않을 것 같은 수수한 차림새였다. 하지만 일단 얼굴을 보면 굳게 닫힌 입과 시원하게 뻗은 코, 그리고 깊이를 알 수 없는 하늘색의 맑은 눈동자가 보는 사람의 마음을 빼앗아 갔다.
그리고 흉터 하나 없이 하얗게 깨끗한 피부로 보아 절대로 용병이나 일반 농민은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로브에는 마법사의 표식이 새겨져 있었다.
‘칫, 잘생긴 놈이군. 거기에 마법사라니.’
도리스는 속으로 세상의 불공평함을 한탄하며 최대한 친절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마법사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은 용병보다 오히려 뒤끝이 안 좋을 수 있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마법사님.”
도리스가 그렇게 웃으며 말을 걸자 상대 마법사도 같이 웃었다. 매력적인 미소였다. 그리고 마법사의 입에서 청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람을 찾으려 합니다.”
“그러시군요. 저희 타렌의 용병길드는 대륙 곳곳의 용병길드와 연합제휴를 하고 있기 때문에 그 어느 곳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찾으시는 분의...”
“제가 찾고 있는 사람의 이름은 라칼리오 지브라스입니다. 보통 라크라고 부릅니다.”
이 마법사는 성질이 급한가보다. 도리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하던 말을 멈췄다. 그리고는 바로 접수서류를 꺼내 고객이 말한 사람의 이름을 적었다.
“예예, 풀네임이 라칼리오 지브라스, 약칭이 라크, 직업과 나이도 알 수 있을까요?”
“나이는 25세이고 마법사입니다.”
“그렇군요. 그럼 의뢰인의 성명을 말씀해 주십시오.”
이게 빠지면 안 된다. 도리스는 접수서류의 가장 위쪽에 있는 의뢰인 성명란을 펜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자 젊은 마법사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생각을 하다가 말했다.
“제 이름도 라크입니다. 찾으려는 사람하고는 혈육과도 같은 관계이지요.”
“아! 사연이 있는 모양이군요.”
“그렇습니다.”
라크는 다시 웃었다. 사정을 자세히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 미안한 듯 했다.
도리스는 그렇게까지 미안해 할 것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의뢰인과 찾는 사람의 이름이 같다는 것에 의아함을 느꼈지만 세상에는 별일이 다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저 그러려니 했다.
사실 용병길드에 들어온 의뢰 중 말 못할 사연이 없는 것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러면서도 이 사람 좋아 보이는 마법사에게 호감을 느꼈다.
나이로 보아도 그렇고, 복장으로 보면 거의 확실하다. 라크는 견습마법사이거나 가장 하급의 마법사일 것이다. 그런 만큼 아직은 마법사들의 그 괴팍한 성격이 없고 젊은 청년의 밝음이 남아 있으니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도리스는 서류를 작성하면서 라크에게는 최소한의 요금만 받기로 했다. 기본적인 요금 이외에는 아무런 바가지도 씌우지 않고 그야말로 실비로 의뢰를 받는 것이다.
‘뭐 젊은 마법사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면 나중에 우리 지부에 도움이 될 수도 있으니까.’
도리스는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느새 라크가 잘 생긴 것에 대해 가졌던 묘한 질투심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알겠습니다. 의뢰인 라크, 됐습니다. 여기에 서명을 해 주시고, 착수금 10실버를 주십시오.”
그는 바로 서류 작성을 끝내고 라크에게 그것을 내밀었다.
라크는 도리스가 시키는 대로 서명 란에 사인을 하고, 품속에서 10실버를 꺼내 접수대위에 놓았다. 이것으로 거래가 성립된 것이다.
“이 증서를 가지고 다니시다가 한 달쯤 후에 주변의 용병길드에 확인을 하십시오. 찾는 분의 신원이 밝혀졌다면 알려드릴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요. 그럼.”
일단 접수가 끝나자 라크는 더 이상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 없는 듯 조용히 몸을 돌려 문 쪽으로 걸어갔다. 딸랑딸랑하는 방울소리가 울리며 그의 모습이 밖으로 사라졌다.
도리스는 평소 하던 대로 의뢰서를 서류에 끼어 넣었다. 이것으로 3급 의뢰 한건이 추가되었다. 별로 중요한 일도 아니니 며칠이 지나면 라크가 증서를 가지고 오기 전까지 이 일에 대해서는 잊을 것이다.
지금 중요한 것은 라크 때문에 못잔 잠을 다시 시도하는 것이다. 아무리 라크의 인상이 좋았다고는 해도 그는 수많은 손님 중 하나, 잠보다 중요하지는 않다. 두 눈이 스르르 감기는 것을 느끼며 도리스는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잠이 오지 않았다. 머릿속에 라크라는 자의 모습이 계속 떠올렸다.
‘왜 이러지? 아무리 그 사람이 잘 생겼어도 내가 신경 쓸 이유는 없는데...’
김운영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