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슈는 절망의 신음성을 흘리며 다시 몸을 날렸다. 그러나 아직 가속도가 붙지 않은 상황이라서 바로 뒤까지 따라잡은 벌레의 무리들을 따돌릴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때 앞쪽에서 커다란 바위가 날아와 카슈가 있던 자리에 떨어졌다.
-쿵
“어서 뛰어요!”
라크였다. 그가 수십 미터 앞에서 커다란 바위를 하나 들어 던진 것이다.
“우와! 자네는 힘이 세군.”
카슈는 거의 감동의 눈물을 흘릴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벌레가 바위에 막혀 돌아오는 사이 그는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휘익, 쿵, 쿵
다시 몇 개의 바위가 날아와 땅에 떨어졌다. 카슈는 정말 열심히 달렸다. 그러나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왜냐하면 커다란 바위가 땅바닥에 자갈처럼 굴러다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는 알아서 뛰어요!”
라크는 그렇게 말하고는 그 자신도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이미 해가 떠서 육체가 생긴 그였기에 벌레들에게 잡힌다면 끝장이었다.
봉우리의 경계가 되는 개울은 바로 눈앞에 있었다. 하지만 벌레들이 개울까지만 따라오다가 그들을 포기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그래도 혹시 이놈들은 물을 싫어하는 것인지도 몰라. 라크는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며 훌쩍 뛰어 개울을 건넜다.
“아앗, 같이 가자고!”
카슈도 얼른 뛰어서 개울을 건넜다. 그 역시 같은 판단을 한 것인지 무리를 해서 뛰었기에 몸의 균형이 흐트러질 정도였다.
-사사사사사
벌레들은 먹물처럼 땅을 검게 물들이며 몰려왔다. 그리고 다행이도 개울 앞에서 일단 멈춰 섰다.
“휴, 물을 싫어하는 놈들이었군.”
카슈는 겨우 살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그렇게 안심을 하는 것도 잠시, 곧 그의 바로 앞쪽 땅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카카카칵
“으응?”-사사사사사
땅에 수십 개의 구멍이 뚫리며 벌레들이 기어 나왔다. 그놈들은 개울 아래쪽으로 흙을 파고 기어 나온 것이다. 사실 그들은 물을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라 약간 싫어할 뿐이었다. 헤엄은 칠 수 없어도 땅속에 물이 찬 것은 관계없었다.
물에 젖어 번들거리고 있는 벌레들의 모습은 가히 죽음의 공포와도 같았다.
“젠장!”
-쾅, 촤아아아아
카슈는 이를 악물로 다시 검을 휘둘렀다. 땅이 파이고 개울의 물이 튀었다. 그러나 벌레들은 물러나지 않았다.
“아아악!”
카슈는 비명을 질렀다. 몇 개의 벌레들이 그의 발에 달라붙었다. 그리고 그들이 가진 날카로운 어금니로 가죽 신발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급히 전신의 기운을 끌어올려 몸을 보호했지만 벌레들의 어금니는 무엇이든 갉아먹을 수 있을 정도로 날카롭고 강하다.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이렇게 끝나는 것인가? 그래도 난 마스터인데...’
카슈는 그렇게 생각하며 이를 악물었다.
그런데 그때, 옆쪽에서 누군가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령의 불꽃, 바람의 벽!”
-화르르륵, 파파파팡
카슈의 바로 뒤쪽으로 거센 화염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화염 주위로 매서운 바람이 불어 벌레들을 뒤로 날렸다. 마법! 그것도 상당히 강력한 마법임에 틀림없다. 카슈는 얼른 그쪽으로 바라보았다.
그때, 마법을 시전한 사람이 다시 외쳤다.
“계속 뛰어요! 링그레스는 쉽게 죽지 않아요!”
“옙!”
기운차게 대답한 카슈는 미친 듯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발뒤꿈치가 벌레에게 물려 따끔거렸지만 지금 그걸 신경 쓸 때가 아니다.
그래도 그는 웃고 있었다. 마법을 시전한 자는 그가 아는 사람이었다.
시르카! 슈앙 밀림의 샤먼이자 숲의 탑의 주인인 그녀가 나타난 것이다.
Chap 8. 엇갈림
시르카는 그녀의 고운 이마를 살짝 찡그리며 계속해서 주문을 외웠다.
“물의 증폭, 나무의 의지!”
-콰콰콰콰
개울물이 갑자기 커다란 강물처럼 불어나며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주변의 벌레들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물살에 휩싸였다.
그리고 개울 건너편의 살아있는 풀과 나무들이 급속도로 성장하여 벌레들의 무리를 막았다. 땅속의 뿌리들조차 이제는 벌레에게 수액을 빼앗기는 식량에서 그들을 막는 그물이 되었다.
-사사사사사
그럼에도 불구하고 벌레들의 식욕은 사라지지 않았는지 전혀 움직임이 둔해지지 않았다. 이들이야 말로 숲의 재앙이라고까지 불리었던 죽음의 포식자, 링그레스인 것이다.
강철보다도 딱딱한 외피와 금속도 갉아 먹을 수 있는 어금니, 그리고 지칠 줄 모르는 식욕으로 모든 것을 삼키는 악몽과도 같은 존재였다.
시르카는 책으로만 보던 링그레스를 이런 곳에서 직접 보게 된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현실을 부정할 수는 없기에 그녀는 계속해서 마법을 사용해 그들을 막았다.
고위마법을 사용하는 데에는 상당한 마나가 소모된다. 모든 정령을 부리며 그 위에 룬의 힘을 접목시킨 정령마법 또한 예외가 아니다.
시르카의 주변에 있는 마나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링그레스는 방향을 바꾸어 시르카를 향해 몰려오기 시작했다.
눈으로 사물을 보지는 못하지만 땅의 진동과 소리, 그리고 마나의 파동으로 먹이를 찾는 것이 그들의 특징이었다.
특히 그들은 몸 안에 마나가 풍부한 식량을 좋아한다. 그런 면에서 시르카는 그들의 본능을 극도로 자극하는 최고의 먹이임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시르카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링그레스를 자신에게로 유인할 하려고 했던 것이다.
“드라이아드의 비명!”
-꺄아아아아아아
그녀가 준비한 마법을 펼치자 사방에 있는 나무들에서 일제히 나무의 정령인 드라이아드가 튀어 나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마법적인 효과가 없이는 보통 사람은 들을 수도 없는 고음의 비명이지만 링그레스는 그 상태로도 충분히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예민한 감각기관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곧 링그레스에 의해 수액을 빨려 죽은 고목들에서도 하얀 영체와도 같은 드라이아드가 나와 같이 비명을 질렀다.
그것은 그녀들의 사념과도 같은 것으로 나무가 죽을 때 같이 죽어 정령계로 돌아간 드라이아드들이 마지막으로 나무속에 남겨 놓은 비명이었다.
-꺄아아아아
-꺄아아아아
비명소리는 나무에서 나무로 메아리 퍼지듯 퍼져 나갔다. 그리고 그 찢어지는 목소리를 들은 링그레스는 몸을 뒤집고 부르르 떨었다. 그렇지 않은 것들은 제자리에서 빙빙 돌던가 아니면 가만히 서서 어금니로 가까운 모든 것을 갉아먹었다.
그들의 본능을 자극하던 모든 감각기관이 뒤엉키고 방향조차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카카카카칵
곧 링그레스들은 서로를 잡아먹기 시작했다. 이미 그들은 정상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흥분해 있었지만, 주변에 있는 것들이라고는 같은 링그레스 밖에는 없었다.
무조건적인 식욕은 드디어 동족에게까지 뻗쳤다.
“대단하군요.”
카슈는 시르카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시르카는 그 모습을 별로 좋지 못한 얼굴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인과의 무리들입니다. 링그레스는.”
“어디서 저런 놈들이 나타났을까요?”
“글쎄요. 저도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라서 상당히 놀라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도 과거에 남겨진 기록에 저놈들을 소리로 상대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쓰여진 것을 제가 읽었기에 손을 쓸 수가 있었네요.”
“그랬군요. 아무튼 시르카님 덕분에 살았습니다.”
-툭
카슈는 그렇게 말하며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제임스를 땅바닥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한쪽에 있는 라크를 가리키며 말했다.
“찾으시던 분이 저사람 맞습니까? 라크라는 이름은 확인했습니다만.”
“아, 저를 위해 수고를 해주셨군요. 감사합니다.”
“천만에요. 하하하.”
카슈는 쑥스럽다는 듯 웃으며 얼버무렸다. 사실 그가 온 이유는 시르카를 돕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제임스가 그녀에게 무례를 범하기 전에 잡아 죽이려는 것이었기 때문에 시르카의 감사를 받을 염치가 없었다.
어쨌거나 다행히도 제임스를 잡았고, 또 라크를 만났으며 시르카가 그와 만나도록 할 수 있었다. 재수가 좋았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때, 라크가 시르카에게 다가왔다. 그는 뭔가 복잡한 얼굴표정을 짓고 있었다.
시르카는 그런 라크를 보며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가 곧 의아한 얼굴로 바뀌었다.
“라크? 절 모르나요?”
그녀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라크가 자신을 경계하고 있음을. 그의 눈빛에는 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마음이 아팠다. 마그나타의 위협을 무릅쓰고 라크를 찾으며 그녀는 생각했었다. 라크만 만나면 모든 일이 잘 풀릴 거라고.
가장 마법사답지 못한 추상적인 바램이었지만 라크에게는 그런 기대를 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항상 조용하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라크였지만 말을 하기 보다는 묵묵히 자신의 일을 행하는 그는 누구보다도 빠른 성장을 보였다.
빛의 마법사가 되기 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 듯 했지만 시르카만은 알고 있었다.
라크는 예전부터 라크라는 것을. 단지 그의 노력이 열매를 맺은 이후 사람들의 보는 시선이 달라졌을 뿐이다.
그 뒤로 10여년에 걸쳐 시르카는 라크를 의지했다. 그리고 라크도 시르카를 의지했다.
그들은 서로에게 있어서 라이벌이자 연인이었다. 3년 전 시르카의 스승인 타라스티가 죽은 이후, 그 둘은 가장 젊은 고위마법사로서 더욱 서로에게 깊은 정을 느꼈다.
그러다가 영혼의 지배자 마그나타가 라크를 습격했고, 그 결과 라크가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들었을 때, 그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마법의 사용이 불가능 해질 정도로 놀랐다.
슬픔과 걱정의 나날이 흘렀다. 그리고 다행히도 지금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지난 1년간 무슨 일이 있었기에? 왜 저런 차가운 눈으로 나를 보는 것일까?
시르카는 방금 전 링그레스가 자신을 향해 몰려오던 때보다 더욱 심하게 마음이 흔들렸다. 뭐라고 말을 하고 싶지만, 목이 메어서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라크도 마찬가지였다.
‘저 여자는 라크를 알고 있다.’
그는 처음 그렇게 생각했다. 위기다! 어떻게 할까? 그는 망설였다. 그러나 속이야 어떻든 간에 평소에 하던 대로 밝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려 했다. 그런데 다음 순간, 라크는 스스로의 심장이 격하게 뛰는 것에 크게 놀랐다.
‘어떻게 된 거지? 왜 이러는 거야?’
아무리 시르카가 아름다운 여자라고 해도 그것만으로 자신이 흥분할 리는 없다. 그 정도의 자제력은 라크에게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시르카를 본 순간부터 그의 전신에서 이상한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심장이 격하게 뛰고, 가슴이 아팠다. 그리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후우.”
라크는 억지로 스스로의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긴 심호흡을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별로 효과가 없었다.
그때 시르카가 먼저 입을 열어 말했다.
“정말로 저를 못 알아 보겠나요? 혹시 기억을 잃은 거에요?”
그녀는 정말로 걱정스러운 눈을 하고 라크에게 다가왔다. 라크는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때서야 그는 알 수 있었다. 그는 지금 시르카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과 음성이 모두 무거운 바위처럼 라크를 괴롭히고 있었다.
“으음, 난 기억을 잃지 않았습니다.”
라크는 대답했다. 그러면서 속으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내가 왜 기억을 잃었다고 말하지 않았지?
기억상실, 그보다 더 좋은 이유는 없다. 그녀를 모른다고 말하고, 앞으로 만날 모든 사람들을 알아보지 못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가장 좋은 핑계는 바로 기억상실이 아닌가?
그리고 그런 척 하고 시르카의 옆에 머물다가 보면, 그를 만날 지도 모른다. 그녀의 눈치를 보아 라크와 시르카는 보통 사이가 아니기 때문에 그는 꼭 시르카를 찾을 것이다.
‘웃어, 라크, 웃어라!’
라크는 스스로에게 명령을 했다. 지난 1년간 그는 사람들에게 접근하기 위한 방법을 모두 터득했다. 어떤 사람에게도 호감을 받을 수 있었다. 사람들과 친해지는 것이 좋았고, 그들에 함께 지내는 것이 즐거웠다.
비록 시르카가 원래의 라크를 안다고 해도, 지금의 자신이라면 그녀와 잘 지낼 자신이 있었다. 어떻게든 그녀를 속여 그녀가 자신을 원래의 라크라고 믿게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 라크는 그럴 수 없었다. 시르카에게는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잠시 입을 다물고 고민에 빠졌다. 정말로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몸이 무엇인가를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머리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괜찮아요? 라크. 무리하지 말아요. 기억이 안 나도 그대는 라크에요.”
시르카는 라크의 손을 잡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기억을 잃었다고 해도, 설혹 마법을 잃었다고 해도 그녀가 라크에게 가진 감정은 변함이 없다.
어떻게 해서든 그를 도와 기억을 되찾게 하겠다고 그녀는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그러나 라크는 시르카가 손을 잡자 그것을 뿌리치며 말했다.
“저는 라크가 아닙니다.”
“라크?”
“기억을 잃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만.”
“그런! 그럼 어째서?”
“그건 비밀입니다.”
“뭐라고요?”
“아무튼 묻지 말아 주십시오.”
라크는 겨우 안정이 된 듯 밝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상처 입은 아이처럼 외롭고 슬퍼 보였다.
<<2권에서 계속>>
김운영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