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신진섭 게임칼럼니스트]
여러분 차 좋아하십니까. 얼마 전에 '포드 V 페라리'라는 영화가 나왔는데 꽤 볼만합니다. 1960년대 포드와 페라리가 세계적인 레이싱 대회 '르망24'에서 맞붙는 내용인데요. 날렵하고 예술적인 페라리와 우직하고 강인한 포드 차량이 트랙을 달리는 모습은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기 충분합니다.
영화에서 포드는 마치 악의 축처럼 묘사됩니다. 포드는 페라리를 인수하려다 창업자인 엔초 페라리에게 거절당합니다. 자존심이 상한 포드는 페라리에게 복수하기 위해 페라리보다 더 빠른 레이싱카를 만드는데 사력을 걸죠. '안 되면 되게 하라'는 식으로 무리한 요구도 남발합니다. 장인 집단인 페라리 대 자본주의의 화신 포드의 구도라고 할까요. 개성 없이 돈만 좇는 포드와 하나를 만들더라도 장인정신을 발휘하는 페라리 말이죠. 누가 좋은 회사인지는 분명해 보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실제 역사는 조금 다릅니다. 그 후 포드는 미국 시장 점유율 1위를 달리며 승승장구했고, 페라리는 재정난을 겪어 경쟁사에 인수당합니다.
게임계에도 비슷한 일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몇 년 동안 게임마니아에 오르는 해묵은 주제기도 합니다. 양산형 게임이 활개 치는 현실이죠.
게임 커뮤니티를 보면 하루에도 수십 번씩 양산형 게임을 지적하는 글을 발견합니다. '스토리가 저질이다', '게임에 깊이가 없다', '창의적이지 않다', '작화가 별로다', '어디서 본 듯하다' 등등.
이런 글은 보통 한국 게임계를 비판하는 내용으로 이어집니다. 천편일률적인 게임만 내놓는 한국 게임사들에게 미래는 없다는 식이죠. 양산형의 반대 항으론 '위쳐' 시리즈 등 콘솔의 AAA급 게임들이 거론됩니다. 포드와 페라리의 대립구도와 닮아 있습니다.
비판만 듣고 보면 양산형 게임은 망해도 백 번은 더 망했어야 할 것 같지만 게임 매출 순위표를 살펴보면 현실은 전혀 다릅니다. 욕을 먹을수록 차트 위에 위치하는 기현상을 발견하게 됩니다. 왜 양산형이 득세하는 걸까요. 양산형은 정말 게임산업을 갉아먹는 악의 축인 걸까요.
◆포드의 성공방정식 '포디즘'
다시 차 얘기로 돌아갑니다. 포드사의 창업자 헨리 포드는 1903년 자본금 10만 달러로 포드 자동차 회사를 설립합니다. 별 볼일 없었던 포드가 지금도 굴지의 기업으로 남을 수 있던 이유는 바로 '양산형' 시스템 때문이었습니다.
포드는 1908년 세계 최초의 양산 대중차 T형 포드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당시 광고 문구를 살펴보시죠.
"우리는 대중을 위한 자동차를 만들겠습니다. 가족 또는 개인이 운전이든 정비든 손쉽게 할 수 있는 자동차입니다. 현대 기술을 총동원해 가장 단순하면서도 최고의 성능과 재질을 가진 차를 만들겠습니다. 그 가격은 어지간한 봉급생활자라면 누구나 구입할 수 있을 만큼 쌉니다."
포드는 당시 자동차의 제작 시스템에 반기를 듭니다. 장인이 맞춤형 제작하던 '테일러' 시스템을 탈피하고 컨베이어 벨트까지 도입해 노동자를 일렬로 서서 똑같은 작업을 반복하는 '라인 생산 시스템'을 정착시킵니다. "5퍼센트가 아니라 95퍼센트를 위한 차를 만들겠다"는 포드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이었습니다.
경쟁자들은 환호했습니다. 포드가 미쳐버렸다고, 경쟁자가 하나 줄었다고요.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포드의 시스템은 획기적인 생산 속도 향상을 가져왔고, 고숙련 노동자 대신 저숙련‧저임금 노동자도 자동차를 만들 수 있게 됐습니다. 그 결과, 포드의 자동차 가격은 경쟁사에 비할 수 없이 저렴해졌고, 성능도 타사에 크게 뒤지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너무 비싼 가격 때문에 자동차를 '그림의 떡'으로 생각했던 소비자들은 열광했습니다. 누구나 자동차를 가질 수 있는 대중화의 시대가 열린 거죠.
페라리는 어떤가요. 누구나 갖고 싶은 선망의 대상이긴 하지만 실용성에선 포드에게 뒤쳐집니다. 과속방지턱이 곳곳에 깔려있는 한국 도로에선 제대로 달릴 수도 없을뿐더러, 연비도 그리 좋지 않습니다. 다수의 선택을 받기는 어려운 제품입니다.
소수가 아닌 대중을 상대로 하는 포드의 소품종 다량생산은 현대 자본주의를 크게 성장시킵니다. 후세에 학자들은 이것을 '포디즘'이라고 이름 붙입니다.
◆95%를 노려라, 양산형의 이유 있는 성공
포드의 성공방정식은 요즘의 게임 시장에 그대로 먹혀들고 있습니다. 5퍼센트가 아니라 95퍼센트를 위한 게임들이 성공하고 있습니다.
최근 모바일게임의 성공여부를 판단하는 척도로 사용되는 구글 플레이 매출 순위를 살펴보면 업계에서 통곡의 벽으로 불리는 '리니지2M'과 '리니지M'이 1, 2위를 지키고 있고 3위는 중국산 수집형 RPG(역할수행게임) 'AFK 아레나', 4위는 게임마니아들이 싫어하는 모바일 MMORPG(다중접속역할게임) 'V4', 5위는 중국산 전략 게임 '라이즈 오브 킹덤즈'입니다.
6위도 중국산 MMORPG '기적의 검', 7위 역시 MMORPG '블레이드&소울 레볼루션', 8위는 동명의 PC게임 IP(지적재산권)를 모바일로 이식한 수집형 '카오스 모바일', 10위는 마니아 사이에서 '일러스트가 별로'라며 비판받는 모바일 수집형 디펜스게임 '명일방주'입니다. 마니아의 시선에서 보면 그 어느 게임 하나 양산형이란 비난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자동 사냥과 방치형 플레이를 통해 시간 소모가 적고, 직관적이고 쉬운 난이도를 갖춰 진입장벽이 낮다는 게 이들 게임의 공통점입니다. 익숙한 서사와 빠른 게임진행 속도도 서로 비슷합니다.
5%의 마니아가 기대하는 게임과 95%의 일반 대중이 사랑하는 게임은 괴리를 보이고 있습니다. 창조적인 세계관과 시스템은 대부분 이용자에게 낯섦으로 다가와 진입장벽으로 작용합니다. 깊이 있는 게임은 이용자에게 더 많은 노력과 플레이타임을 요구하곤 합니다. 일일 플레이타임이 길고, 난이도가 높으며 직관적이지 않은 게임은 대다수의 이용자에게 외면 받고 있습니다. 매출적으로는 '망겜'이란 소리죠. 개발사가 자선단체가 아닌 이상 어느 쪽에 초점을 맞추고 게임을 만들어내야 할지는 분명합니다.
◆그들에게도 왕년이 있다, 아재들은 무죄다
누군가는 '아재'들이 게임판을 망쳐놓았다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뭐가 좋은 게임인지 구분할 수 없는 중년층들이 '현질게임'에만 과금을 해, 창의적인 게임들이 고사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하지만 이 역시 과도한 비판이라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흔히 '아재'라 불리는 20대 후반 이상의 이용자들은 게임할 시간이 충분치 않았습니다. 직장에 집안일, 육아까지 하다보면 하루 몇 시간 씩 게임에 투자한다는 건 언감생심인 상황입니다. 심오한 세계관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불가능할 정도로 그들의 심신은 지쳐있습니다. 출근길이나 퇴근길, 대중교통에서 짬짬이 핸드폰을 들여다 볼 수 있을 정도만 허락되는 삶이 대부분입니다. 이들도 과거엔 게임으로 기꺼이 밤을 지새우던 열혈 게이머였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체력도, 시간도 허락하지 않죠.
이들에게 양산형 게임은 충분한 대안으로 작용합니다. 전에 해봤던 게임과 비슷하다는 건 적응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고, '현질빨'이 잘 듣는다는 건 과금으로 이들에게 부족한 시간을 구매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무한경쟁에 지친 직장인들에게 모바일 MMORPG는 현실에서 좌절된 '강자의 힘'을 느낄 수 있는 자아실현의 장소입니다.
그래서 게임계는 일종의 '포디즘'을 가동합니다. 독창적이거나 혁신적이진 않지만 대부분을 만족시켜줄 수 있는 게임문법을 가져다 씁니다. 강화하고 진화하며 SR, SSR, UR를 얻고, 9등신의 탱딜힐 캐릭터와 소수의 '로리캐'가 등장하는, 일률적인 도감‧업적 시스템을 갖춘 양산형 게임은 이미 시장에서 어느 정도 재미가 검증된 스테디셀러인 셈이죠.
◆'아~샌즈 아시는구나'…착한 게임의 역설
양산형 게임이 비판받는 또 다른 이유는 과금을 '강요'한다는 겁니다. 돈을 쓰지 않으면 재미를 느끼지 못하게 게임이 설계돼 있다는 건데요. 물론 매출이 모든 걸 말하진 않습니다. 과도한 과금유도는 비판 받아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과금 유도가 없는 착한 게임이라고 그 끝이 다 좋은 건 아닙니다.
몇 푼 내지 않아도 엔드 콘텐츠(끝판왕)를 클리어할 수 있는 온라인 게임이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시나리오도 탄탄하고 독창적인데다가 재미까지 있는 그야말로 놀라운 게임입니다. 처음에는 이용자들의 칭송이 커뮤니티를 뒤덮습니다. 한국 게임의 희망이라든가 한국의 유일한 개발사라는 칭찬을 들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서비스 기간이 길어지며 문제가 비어져 나옵니다. 게임을 서비스하는 건 매순간이 돈입니다. 서버 관리비에 개발자 월급이 '따박따박' 빠져나가죠. 이용자가 행복한 세상에 없는 '갓겜'을 만들 거라는 생각은 점점 무너집니다. 개발비가 없다보니 인원 충원은 꿈꾸기 어렵고, 콘텐츠 업데이트, 버그 픽스는 지연됩니다. 엔드 콘텐츠를 밤새워 클리어한 이용자들은 업데이트를 하라고 아우성입니다. 없는 살림에 쥐어짜서 밤샘을 거듭하지만 상황은 점점 나빠집니다. 이용자들은 콘텐츠가 빈약하고 서버관리가 안된다며 다른 게임으로 넘어가기 시작합니다. 게임 평판은 곤두박질칩니다.
선택지는 정해져 있습니다. 서비스를 종료하거나 기존 철학을 뒤집고 과금요소를 강화하는 겁니다. 전자는 명예로운 죽음일지 모르나 회사가 도산 위기에 시달리게 되고, 후자는 이용자의 강한 반발과 이탈을 마주하게 됩니다. 두 선택지 모두 '이래서 중소기업게임은 하면 안 된다'는 비판에 시달려야 하는 건 똑같습니다.
게임사는 '어쩔 수 없다'고 항변하지만, 이용자들은 냉랭하게 답변하죠. '언더테일'이나 '마인크래프트' 같은 게임을 왜 못만드냐는 식이죠. 이 두 게임은 착한 인디게임도 성공할 수 있다는 대표적인 사례지만, 동시에 현실을 왜곡하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인디게임은 다운로드 수 1000을 넘지 못하고 시장에서 철저히 외면된 채 사장됩니다. 실력은 물론 운까지 겹친 아주 소수의 게임만이 대중의 뇌리에 남습니다.
게임은, 특히나 최근의 게임 시장은 혁신적인 아이디어만으로 승부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미술이나 음악, 사진 등 예술분야는 소수가 적은 비용으로 제작이 가능하지만 게임은 다릅니다. 적게는 몇 명에서 많게는 수백 명의 인원이 투입돼야 게임을 완성할 수 있습니다. 아이디어가 제 아무리 혁신적이라고 하더라도 실제로 만들어진 게임이 돈을 벌어들일 수 있냐는 별개의 문제가 됐습니다. 95%를 겨냥해 화려한 그래픽으로 무장하고 말초 신경을 자극하는 게임이 일 년에 수백, 수천 개가 나오고 있습니다.
◆양산형보다 무서운 무과금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나쁜 재화가 시장의 주류가 돼, 좋은 재화를 몰아낸다는 뜻입니다. 마니아의 눈으로 보는 요즘 한국 게임계가 아마 이 말과 들어맞지 않을까 싶습니다.
양질의 게임을 많이 등장시키는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합니다. 수요와 공급의 원칙이죠. 이른바 '갓겜'에 더 많은 자원이 쏠린다면(수요) 게임사들이 자연스레 이런 게임을 만들게(공급) 될 겁니다.
예전보다야 많이 나아졌지만 요즘에도 게임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안타까움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게임에 돈을 쓰면 어리석다'는 일부 이용자의 태도가 그렇습니다. '다량 생산체제'로 밀어닥치는 할리우드 영화 티켓을 구매하는 건 자연스럽게 느끼지만 국산 게임 과금은 돈낭비라고 생각하는 이용자들이 존재합니다.
게임이 괜찮다면, 완벽하진 않더라도 이런 종류의 게임을 시장에서 더 많이 발견하고 싶다면 적정한 과금이야 말로 한국 게임계에 보내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라는 옛날 광고 문구처럼 콘텐츠는 소비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발전하고, 또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정리=이원희 기자(cleanrap@dailygam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