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러분 차 좋아하십니까. 얼마 전에 '포드 V 페라리'라는 영화가 나왔는데 꽤 볼만합니다. 1960년대 포드와 페라리가 세계적인 레이싱 대회 '르망24'에서 맞붙는 내용인데요. 날렵하고 예술적인 페라리와 우직하고 강인한 포드 차량이 트랙을 달리는 모습은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기 충분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실제 역사는 조금 다릅니다. 그 후 포드는 미국 시장 점유율 1위를 달리며 승승장구했고, 페라리는 재정난을 겪어 경쟁사에 인수당합니다.
게임계에도 비슷한 일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몇 년 동안 게임마니아에 오르는 해묵은 주제기도 합니다. 양산형 게임이 활개 치는 현실이죠.
게임 커뮤니티를 보면 하루에도 수십 번씩 양산형 게임을 지적하는 글을 발견합니다. '스토리가 저질이다', '게임에 깊이가 없다', '창의적이지 않다', '작화가 별로다', '어디서 본 듯하다' 등등.
이런 글은 보통 한국 게임계를 비판하는 내용으로 이어집니다. 천편일률적인 게임만 내놓는 한국 게임사들에게 미래는 없다는 식이죠. 양산형의 반대 항으론 '위쳐' 시리즈 등 콘솔의 AAA급 게임들이 거론됩니다. 포드와 페라리의 대립구도와 닮아 있습니다.
비판만 듣고 보면 양산형 게임은 망해도 백 번은 더 망했어야 할 것 같지만 게임 매출 순위표를 살펴보면 현실은 전혀 다릅니다. 욕을 먹을수록 차트 위에 위치하는 기현상을 발견하게 됩니다. 왜 양산형이 득세하는 걸까요. 양산형은 정말 게임산업을 갉아먹는 악의 축인 걸까요.
◆포드의 성공방정식 '포디즘'

포드는 1908년 세계 최초의 양산 대중차 T형 포드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당시 광고 문구를 살펴보시죠.
"우리는 대중을 위한 자동차를 만들겠습니다. 가족 또는 개인이 운전이든 정비든 손쉽게 할 수 있는 자동차입니다. 현대 기술을 총동원해 가장 단순하면서도 최고의 성능과 재질을 가진 차를 만들겠습니다. 그 가격은 어지간한 봉급생활자라면 누구나 구입할 수 있을 만큼 쌉니다."
포드는 당시 자동차의 제작 시스템에 반기를 듭니다. 장인이 맞춤형 제작하던 '테일러' 시스템을 탈피하고 컨베이어 벨트까지 도입해 노동자를 일렬로 서서 똑같은 작업을 반복하는 '라인 생산 시스템'을 정착시킵니다. "5퍼센트가 아니라 95퍼센트를 위한 차를 만들겠다"는 포드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이었습니다.

페라리는 어떤가요. 누구나 갖고 싶은 선망의 대상이긴 하지만 실용성에선 포드에게 뒤쳐집니다. 과속방지턱이 곳곳에 깔려있는 한국 도로에선 제대로 달릴 수도 없을뿐더러, 연비도 그리 좋지 않습니다. 다수의 선택을 받기는 어려운 제품입니다.
소수가 아닌 대중을 상대로 하는 포드의 소품종 다량생산은 현대 자본주의를 크게 성장시킵니다. 후세에 학자들은 이것을 '포디즘'이라고 이름 붙입니다.
◆95%를 노려라, 양산형의 이유 있는 성공

최근 모바일게임의 성공여부를 판단하는 척도로 사용되는 구글 플레이 매출 순위를 살펴보면 업계에서 통곡의 벽으로 불리는 '리니지2M'과 '리니지M'이 1, 2위를 지키고 있고 3위는 중국산 수집형 RPG(역할수행게임) 'AFK 아레나', 4위는 게임마니아들이 싫어하는 모바일 MMORPG(다중접속역할게임) 'V4', 5위는 중국산 전략 게임 '라이즈 오브 킹덤즈'입니다.
6위도 중국산 MMORPG '기적의 검', 7위 역시 MMORPG '블레이드&소울 레볼루션', 8위는 동명의 PC게임 IP(지적재산권)를 모바일로 이식한 수집형 '카오스 모바일', 10위는 마니아 사이에서 '일러스트가 별로'라며 비판받는 모바일 수집형 디펜스게임 '명일방주'입니다. 마니아의 시선에서 보면 그 어느 게임 하나 양산형이란 비난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자동 사냥과 방치형 플레이를 통해 시간 소모가 적고, 직관적이고 쉬운 난이도를 갖춰 진입장벽이 낮다는 게 이들 게임의 공통점입니다. 익숙한 서사와 빠른 게임진행 속도도 서로 비슷합니다.

◆그들에게도 왕년이 있다, 아재들은 무죄다

흔히 '아재'라 불리는 20대 후반 이상의 이용자들은 게임할 시간이 충분치 않았습니다. 직장에 집안일, 육아까지 하다보면 하루 몇 시간 씩 게임에 투자한다는 건 언감생심인 상황입니다. 심오한 세계관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불가능할 정도로 그들의 심신은 지쳐있습니다. 출근길이나 퇴근길, 대중교통에서 짬짬이 핸드폰을 들여다 볼 수 있을 정도만 허락되는 삶이 대부분입니다. 이들도 과거엔 게임으로 기꺼이 밤을 지새우던 열혈 게이머였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체력도, 시간도 허락하지 않죠.
이들에게 양산형 게임은 충분한 대안으로 작용합니다. 전에 해봤던 게임과 비슷하다는 건 적응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고, '현질빨'이 잘 듣는다는 건 과금으로 이들에게 부족한 시간을 구매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무한경쟁에 지친 직장인들에게 모바일 MMORPG는 현실에서 좌절된 '강자의 힘'을 느낄 수 있는 자아실현의 장소입니다.

◆'아~샌즈 아시는구나'…착한 게임의 역설
양산형 게임이 비판받는 또 다른 이유는 과금을 '강요'한다는 겁니다. 돈을 쓰지 않으면 재미를 느끼지 못하게 게임이 설계돼 있다는 건데요. 물론 매출이 모든 걸 말하진 않습니다. 과도한 과금유도는 비판 받아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과금 유도가 없는 착한 게임이라고 그 끝이 다 좋은 건 아닙니다.
몇 푼 내지 않아도 엔드 콘텐츠(끝판왕)를 클리어할 수 있는 온라인 게임이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시나리오도 탄탄하고 독창적인데다가 재미까지 있는 그야말로 놀라운 게임입니다. 처음에는 이용자들의 칭송이 커뮤니티를 뒤덮습니다. 한국 게임의 희망이라든가 한국의 유일한 개발사라는 칭찬을 들을 수도 있겠습니다.

선택지는 정해져 있습니다. 서비스를 종료하거나 기존 철학을 뒤집고 과금요소를 강화하는 겁니다. 전자는 명예로운 죽음일지 모르나 회사가 도산 위기에 시달리게 되고, 후자는 이용자의 강한 반발과 이탈을 마주하게 됩니다. 두 선택지 모두 '이래서 중소기업게임은 하면 안 된다'는 비판에 시달려야 하는 건 똑같습니다.
게임사는 '어쩔 수 없다'고 항변하지만, 이용자들은 냉랭하게 답변하죠. '언더테일'이나 '마인크래프트' 같은 게임을 왜 못만드냐는 식이죠. 이 두 게임은 착한 인디게임도 성공할 수 있다는 대표적인 사례지만, 동시에 현실을 왜곡하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인디게임은 다운로드 수 1000을 넘지 못하고 시장에서 철저히 외면된 채 사장됩니다. 실력은 물론 운까지 겹친 아주 소수의 게임만이 대중의 뇌리에 남습니다.
게임은, 특히나 최근의 게임 시장은 혁신적인 아이디어만으로 승부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미술이나 음악, 사진 등 예술분야는 소수가 적은 비용으로 제작이 가능하지만 게임은 다릅니다. 적게는 몇 명에서 많게는 수백 명의 인원이 투입돼야 게임을 완성할 수 있습니다. 아이디어가 제 아무리 혁신적이라고 하더라도 실제로 만들어진 게임이 돈을 벌어들일 수 있냐는 별개의 문제가 됐습니다. 95%를 겨냥해 화려한 그래픽으로 무장하고 말초 신경을 자극하는 게임이 일 년에 수백, 수천 개가 나오고 있습니다.
◆양산형보다 무서운 무과금

양질의 게임을 많이 등장시키는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합니다. 수요와 공급의 원칙이죠. 이른바 '갓겜'에 더 많은 자원이 쏠린다면(수요) 게임사들이 자연스레 이런 게임을 만들게(공급) 될 겁니다.
예전보다야 많이 나아졌지만 요즘에도 게임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안타까움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게임에 돈을 쓰면 어리석다'는 일부 이용자의 태도가 그렇습니다. '다량 생산체제'로 밀어닥치는 할리우드 영화 티켓을 구매하는 건 자연스럽게 느끼지만 국산 게임 과금은 돈낭비라고 생각하는 이용자들이 존재합니다.
게임이 괜찮다면, 완벽하진 않더라도 이런 종류의 게임을 시장에서 더 많이 발견하고 싶다면 적정한 과금이야 말로 한국 게임계에 보내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라는 옛날 광고 문구처럼 콘텐츠는 소비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발전하고, 또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정리=이원희 기자(cleanrap@dailygam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