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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겜문학개론] 나는 게임한다, 고로 존재한다

2020년 새해를 맞아 데일리게임에서 새로운 형식의 칼럼을 준비했습니다. 인문학도의 눈으로 게임과 게임 세상 이야기를 해보는 코너입니다. 오랜 기간 게임을 즐겨온 '찐 게이머' 필자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분야와 연결된 게임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 독자 여러분께 전달할 예정입니다. < 편집자주 >

[글=신진섭 게임칼럼니스트]

넷플릭스 '스트라이킹 바이퍼스'의 한 장면.
넷플릭스 '스트라이킹 바이퍼스'의 한 장면.
죽마고우였던 두 남자가 오랜만에 홈파티에서 만났습니다. 게임 키드였던 둘은 옛 추억을 살려 최신 VR(가상현실) 대전 액션게임 '스트라이킹 바이퍼스'를 플레이합니다. 게임은 놀랄 만큼 현실적이어서 현실과 게임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였죠. 리얼한 싸움을 즐기던 두 친구는 곧 게임이 아닌 다른 유혹에 빠져버리게 됩니다. 서로의 게임 캐릭터에게 반해 가상현실에서 사랑을 나누고(!) 맙니다. 현실에선 두 친구 모두 여자친구가 있는 이성애자였음에도 불구하구요.

넷플릭스의 시리즈물 '블랙미러5'의 '스트라이킹 바이퍼스' 에피소드 내용입니다. 여기서 질문. 두 친구는 동성애자일까요? 또 두 남자의 애정행각은 외도로 볼 수 있을까요? 게임 속에서 일어난 일일 뿐, 현실과는 관련이 없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친구와 사랑을 나눴다는 기억과, 유사한 경험을 반복하고 싶다는 욕망은 엄연히 현실세계에도 영향을 끼칩니다. 가상현실에 불과했던 게임과 현실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지점입니다.

◆현실을 전복한 '레디 플레이어 원'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레디 플레이어 원'.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레디 플레이어 원'.
지난 2018년 개봉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레디 플레이어 원'도 경계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2045년, 양극화가 심화돼 암울한 현실에 놓인 사람들은 가상현실 '오아시스(OASIS)'에서 살아갑니다. '오아시스'에서는 상상하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누구나 원하는 외모를 갖출 수 있고, 가고 싶은 곳 어디든지 갈 수 있죠. 사람들이 현실에서 일을 하는 이유는 '오아시스' 구동 기계와 계정비용을 내기 위해서입니다. 현실과 게임세계의 입지가 전복된 세계관이죠.

'검은사막' 커스터마이징.
'검은사막' 커스터마이징.
SF영화에서만 한정된 얘기는 아닙니다. 게임에 빠져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 '정말로 이런 세계가 존재했으면'하고 바랐던 적이 있겠죠. '쭉쭉빵빵' 8등신 캐릭터에 근육질 몸매, 대궐 같은 성채, 이성으로부터의 갈채가 모두 내 것이 되는 만족감은 분명 현실이 주지 못하는 그 어떤 것입니다.

'리니지' 성주.
'리니지' 성주.
우리는 게임 속 분신인 아바타에게 자아를 덧씌웁니다. 내 캐릭터가 공격받으면 분노하고, 성장하면 보람을 느낍니다. 게임 속에선 현실에서 소심한 내가 길드를 호령하는 군주가 될 수도, 턱수염이 덥수룩한 아저씨가 단발머리가 어울리는 미소녀가 될 수도 있죠. 모두가 '플레이어 원(1P)'이 될 수 있는 게임이란 공간은 현실의 불만족을 해결하는 일종의 대체세계로서 작동합니다.

◆게임이 아니라고 증명할 수 있습니까

기계어. 게임은 0과 1이 반복되는 기계어에 그래픽을 입힌 가짜다.
기계어. 게임은 0과 1이 반복되는 기계어에 그래픽을 입힌 가짜다.
분명 머리로는 게임이 0과 1이 반복되는 기계어에다가 도트를 찍어 그래픽을 입힌 가짜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죠. '현질'과 '현피(현실 PK)'는 게임세계와 현실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다는 조짐입니다. 자아는 뒤섞이고, 기회비용을 현실이 아닌 가상세계에 투입하죠.

한 발짝 더 나아가 볼까요? 지금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 게임이 아니라는 증거는 어디있습니까. AC 2500년, 과학기술이 극도로 발달해서 현실의 모든 감각을 재현할 수 있는 MMORPG(다중접속역할수행게임) '라이프 온라인'이 탄생한 겁니다. 실제 당신은 안드로메다 성운 어딘가에서 살고 있는 외계인이죠. 지구라는 것도 원래는 없는 게임 속 가상의 행성입니다.

영화 '매트릭스'의 악당 스미스 요원.
영화 '매트릭스'의 악당 스미스 요원.
당신의 친구들 모두 NPC(사람이 아닌 캐릭터)에 불과합니다. 당신이 보지 않을 때는 모두 작동을 멈추고 대기상태에 들어갑니다. 매일같이 나오는 뉴스도 당신을 위한 이벤트에 불과합니다. 실제로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게임이라기엔 너무 진짜(현실) 같다는 말은 순환논리에 불과합니다. 어제 당신이 먹었던 족발은 원래 그런 맛이 맞습니까? 족발은 3D 그래픽으로 탄생한 0과 1로 구성된 데이터에 불과하다면 어떨까요. 당신이 느끼는 감각은 그저 컴퓨터 논리 연산으로 탄생한 일종의 '이펙트'에 불과한 거죠. 당신은 게임이 그렇게 느끼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감각합니다.

아니, 당신은 그저 NPC에 불과합니다.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한다는 '자유의지'도 착각에 불과합니다. 그저 그렇게 프로그래밍돼 있을 뿐이죠. 당신의 운명이란 건 이미 게임 개발자에 의해 정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이 이렇게 하드코어한 거죠. 이름도 기억하기 어려운 수많은 게임 속 NPC처럼 당신은 주인공을 돋보이게 만들기 위해 존재할 뿐입니다.

◆'통 속의 뇌', 컴퓨터에게 만든 세상

'버터플'.
'버터플'.
무슨 '중2병' 같은 소리냐고요? 그렇게 단순히 치부할 얘깃거리는 아닙니다. 우리가 누구이고 무엇을 알 수 있느냐에 대해 인류는 벌써 몇천 년 동안 고민해오고 있습니다.

어느 날 꿈속에서 장자는 나비가 되어 꽃발을 날아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꿈을 깨어보니 자신은 장자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순간 장자는 혼란에 빠집니다. '장자가 나비의 꿈을 꾼 것인가 나비가 장자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장자가 꾼 이 꿈을 장주지몽(莊周之夢) 또는 호접지몽(胡蝶之夢)이라고 부릅니다. 게임으로 비유하면 '장자 온라인'인지 '나비 온라인'인지 판단하기 불가능하다는 거죠.

'매직더게더링' 카드 '병 속에 담긴 뇌'.
'매직더게더링' 카드 '병 속에 담긴 뇌'.
'통 속의 뇌(Brain in a vat)'라는 사고실험이 있습니다. 당신의 육체는 어제 사고로 모두 소멸했습니다. 오직 뇌만 남아 전해질이 가득한 통 속에 둥둥 떠다니는 상태입니다. 당신을 안타깝게 여긴 천재 과학자는 컴퓨터를 이용해 당신을 불행에서 구원하고자 합니다. 컴퓨터가 전자신호를 뇌에 가해 감각을 재현하도록 만든 겁니다. 모든 외부경험은 컴퓨터가 주입한 겁니다. 당신이 보고 있는 이 기사까지도 말이죠.

통 속의 뇌 실험은 데카르트적 사고를 기초로 합니다. 믿을 수 없는 건 모두 배제하면 진정 믿을 수 있는 것을 발견한다는 회의주의가 그것이죠. 데카르트에 따르면 사물, 관념, 이상, 가치, 인간 모두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해낼 수 없습니다. 회의주의적 사고를 극단으로 밀어붙인 데카르트의 결론이 바로 그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코기토 에르고 줌)'입니다. 세상 모든 것이 거짓이어도 '내가 지금 생각하고 있다'는 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이라는 겁니다.

'통 속의 뇌' 디씨 버전.
'통 속의 뇌' 디씨 버전.
◆스탠리 패러블, 이것은 왜 게임이 아니란 말인가
커다란 빌딩 안에 있는 어느 회사에서 사원번호 427번으로 일하는 당신은 단순 반복 사무직이지만 어느 순간 상부에서 지시가 내려오지 않아 불안감을 느끼게 된다. 그가 사무실 문을 나서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이야기는 시작되는데...

지난 2013년에 출시된 인디게임 '더 스탠리 패러블'의 오프닝 부분입니다. 이 게임은 현실과 가상세계의 벽을 의도적으로 붕괴시키는 것이 특징입니다. 영국식 영어를 구사하는 나레이터는 당신(스탠리)이 지시대로 움직여서 해피엔딩에 도달할 것을 권유합니다. 보통의 게임이라면 여기서 끝이 나겠죠. 하지만 이 게임은 영원히 끝이 나지 않습니다. 엔딩을 보고 또 봐도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사원번호 427번 스탠리는 다시 깨어나게 되죠.

의아함을 느낀 플레이어는 기존에 가지 않았던 길, 하지 않았던 행동을 하게 되고 나레이터는 플레이어의 행동을 제지하려 합니다. 아직 개발이 완료되지 않은 방에 들어가려는 플레이어를 꾸짖고, 제발 그 버튼은 누르지 말아달라며 간청을 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게임 코드를 손보거나 치트키를 사용하는 플레이어는 '반칙'이라며 게임을 종료시키기도 하죠.

벨기에의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대표작 '이미지의 배반(La trahison des images)'. 파이프가 그려져 있지만 그 아래에는 'Ceci n'est pas une pipe(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쓰여 있다.
벨기에의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대표작 '이미지의 배반(La trahison des images)'. 파이프가 그려져 있지만 그 아래에는 'Ceci n'est pas une pipe(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쓰여 있다.
'더 스탠리 페러블'은 게임은 대체 무엇인가에 대한 우화입니다. 데카르트적 회의주의가 깊게 깔려 있죠. 게임 캐릭터는 '이것이 게임이다'는 말을 발설해선 안 된다는, 해피엔딩과 도전과제 클리어가 게임의 목표라는, 심지어 게임은 재미있어야 한다는 본질적인 가치관에 태클을 거는 거죠.

놀랍게도 '더 스탠리 패러블'은 평단과 게임 이용자 모두에게 호평을 받았습니다. 게임 같지 않은 게임에 '독창적이고 창의적인 게임'이라는 찬사라니. 아이러니하지 않습니까.

◆게임이 없다면 현실도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네오(키아누 리브스)는 진실을 깨닫게 해주는 빨간약을 선택한다. 모든 것이 지난 뒤 관객은 네오가 선택한 진실도 결국 허구의 일부분이라는 걸 알게 된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네오(키아누 리브스)는 진실을 깨닫게 해주는 빨간약을 선택한다. 모든 것이 지난 뒤 관객은 네오가 선택한 진실도 결국 허구의 일부분이라는 걸 알게 된다.
'더 스탠리 패러블'에서 데카르적 회의주의를 읽어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게임이라고 믿는 것, 그 성질들을 하나씩 제거하면서 결국 마지막에 남는 게 진짜라는 거죠.

'더 스탠리 패러블'의 성공은 '게임의 본질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게 아닐까'라는 화두를 남겼습니다. '게임이 무엇이다'는 정의가 사라진다면 게임은 현실과 다르다는 주장도 의미가 퇴색합니다. 애초에 게임이 뭔지 모르는데 어떻게 차이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데카르트 이후에 철학은 실존은 본질에 우선한다는 '실존주의'와 의식을 하나의 현상으로 파악한 '현상학' 등으로 발전해 왔습니다. 이에 비춰보면 게임이란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없으며 그저 게임이 존재하며 내가 게임을 하고 있다는 사실만을 증명해낼 수 있을 뿐입니다.

과학기술이 발전해 현실 같은 세계를 재창조해 낼 수 있을 때, 과연 게임세계로 넘어가지고 않고 현실에 남아 있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인류 대다수가 조그마한 인큐베이터에 누워 평생을 가상세계에서 보내는 세상이 찾아올지도 모르죠. 그때쯤이면 철학자들은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바꿔써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게임한다, 고로 존재한다'로 말이죠.

정리=이원희 기자(cleanrap@dailygam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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