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신진섭 게임칼럼니스트] 어느 날 문득 진짜 오리지널 옛날 게임을 하고 싶어졌습니다. 이를테면 '창세기전3: 파트2'나 '씰', '포가튼 사가' 같은 명작 고전 RPG(역할수행게임) 말입니다. IP(지적재산권)를 고아낸 재탕, 삼탕 게임 대신 지친 마음을 힐링 할 수 있는 그때 그 게임이 그리워진 겁니다.
실제 플레이까지는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판매는 중단된 지 오래, 중고장터에도 가끔 매물이 올라오지만 가격은 예상을 웃돌았습니다. 요즘 나오는 PC에는 CD롬 드라이브가 달려있지 않아서 별도의 외장 드라이브 구매가 필요했습니다. OS(운영프로그램)가 맞지 않아 결국 게임을 돌릴 수 없었습니다. 파티션을 나누고 가상 프로그램을 설치해야 한다는데 '귀차니즘'이 엄습했습니다.
IP 홀더인 게임사에 데이터 좀 받을 수 없겠냐고 전화를 넣었습니다. 대답은 예상외였습니다. 데이터는 물론 CD도 없다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사정은 이렇습니다. 1세대 게임사들이 경영난으로 사분오열하면서 게임과 관련된 데이터들이 대부분 소실됐다고 합니다. 그 당시는 데이터 보존에 대한 개념도 희박했을 뿐더러 클라우드 서비스도 없어서 회사가 도산하면 게임 데이터도 같이 폐기처분 됐던 거죠. IP는 있지만 게임은 없는, 황당한 상황이 펼쳐진 배경입니다.
◆그 많던 고전게임은 다 어디 갔을까
1987년 국내 최초의 상용 게임 '신검의 전설'이 출시된 지 근 30년이 지났습니다. 국내 게임의 역사가 벌써 수십 년, 문화라고 부르기 부족함이 없죠. 하지만 문화유산을 보존해야 한다는 인식은 아직도 희박한 편입니다.
제주도에 위치한 '넥슨컴퓨터박물관'이 국내 게임 관련 박물관으로선 가장 큰 규모로 알려져 있습니다. 지난해 누적 관람객이 100만 명을 돌파했죠. 박물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넥슨 게임과 PC게임 기기에 집중한 전시물을 보관하고 있습니다. 소장 게임은 수천 개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대부분 게임이 폐가식으로 운영돼 열람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경기도 헤이리 예술마을에도 민간 게임박물관이 있습니다만 아케이드게임 위주입니다. 한국 PC게임의 역사를 되짚어 볼 만한 사료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한국콘텐츠진흥원 콘텐츠도서관이 일부 게임 아카이빙(수집) 역할을 수행하지만 양적인 면에선 부족함이 역력합니다. 전라남도 나주에 위치해 접근성도 떨어지는 편입니다.
◆고전 게임 클라우드 게이밍 플랫폼은 어떨까
얼마 전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게임문화박물관 설립을 본격 추진하기로 했습니다.
박물관 설립은 국가차원의 일이라고는 하나 민과 관의 협력이 적극 요구되는 사업입니다. 이용자와 게임사, 국가가 모두 만족할 수 있는 방안을 도출해 내는 게 최우선 과제겠습니다. 무엇보다 수백억 원에 달하는 예산을 확보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예산 확보에 고전 게임을 활용하는 건 어떨까요. 대부분의 한국 고전 게임은 IP홀더는 있지만 게임으로 인한 수익은 전무한 상태입니다. 고전 게임을 플레이하고자 하는 수요는 있지만 이를 충족시켜줄 만한 공급이 부족한 겁니다.
민관이 협력해 고전 게임 클라우드 게이밍 플랫폼을 만들면 어떨까요. 'K-게임즈 클래식' 같은 이름으로 말이죠. 넷플릭스처럼 구독경제형으로 일정비용을 지불하면 한 달 동안 무제한으로 언제 어디서나 고전 명작을 즐길 수 있게 하는 거죠. IP홀더는 없던 수익이 생기니 좋고, 이용자는 편하게 추억의 게임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관은 수입의 일정 비율을 플랫폼 수수료 명목으로 받아 박물관 설립 비용으로 사용하면 좋을 듯 합니다.
고전 크라우드 게이밍 플랫폼은 아카이브와 온라인 박물관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이런 게임이 있었다는 수동적인 접근이 아닌 실제 플레이까지 가능한 능동체험형 박물관이 되는 셈이죠.
레트로 게임 스트리밍 서비스는 이미 해외에서 상업성을 인정받은 서비스이기도 합니다. 지난해 중국의 게임 공룡 텐센트가 영국의 스타트업 앤트스트림아케이드에 투자해 눈길을 끈 바 있습니다.
고전 게임의 콘텐츠의 성격도 게임 스트리밍 서비스와 적합하다는 평입니다. 요구사양이 높지 않고 게임성이 비교적 단순해 모바일 환경과 어울린다는 거죠. 클라우드 게이밍의 고질병인 지연시간 문제도 고전 게임에선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한국게임 30년, 게임사를 써내려가야 할 때
해외여행 때 발이 부르트도록 미술과과 박물관을 싸돌아다녔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나 미국 워싱턴의 스미스소니언과 자연사박물관, 뉴욕의 모마 현대 미술관과, 독일의 쉬른 쿤스트할레(Schirn Kunsthalle)까지.
세계의 유명 도시에는 그 격에 걸맞은 박물관이 있습니다. 박물관은 문화적 유산을 기록하는 공간인 동시에 창작자의 영감을 고취시키고 관광객들에게 위상을 뽐내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한국은 게임 종주국이라고 스스로를 칭하지만 장르적 다양성은 날로 협소해지는 형국입니다. 과금을 유도하는 모바일 수집형 RPG가 '한국적 게임'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특히 패키지 시장은 괴멸상태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간 한국 게임역사에 무심했던 환경이 장르 편향성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면 지나친 해석일까요. 90년대 패키지 시장의 부흥기,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개발사‧배급사들의 흥망성쇠는 사료조차 남아있지 않습니다. 과거 우리에게도 패키지 '갓겜'이 존재했지만 현재는 어느 누구도 시도하지 않는 불모의 땅이 됐습니다.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처럼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은 국산게임들의 이름들을 불러봅니다. 정모의 기쁨을 알려줬던 '포 리프(4leaf)', 벨트스크롤 액션게임 입문작 '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저녁', 버그가 너무 많아 게임 진행도 어려웠던 '버그나깔았다', 아니 '마그나카르타', 이외 게임 잡지에 번들로 딸려왔던 수많은 게임들. 분명 찬란한 유산이지만 이들에게는 아직 역사의 한 페이지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한국 게임사(史)를 기록할 만한 아카이브가 하루 빨리 출현하기를 바랍니다.
정리=이원희 기자(cleanrap@dailygam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