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전투
러시아 모스크바(Moskva)
“헤이. 레베제바. 너도 불려왔군.”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선글라스를 끼고 스포츠머리를 한 다부진 체격의 남자를 보더니 방에 있던 한 여성이 아는체하며 콧방귀를 뀌었다.
“이시노프. 아직 안 죽고 살아 있었군.”
“크크···. 덕분에.”
“레베제바. 조용히 해. 여긴 놀이터가 아니야. 대통령께서 계시는 크래림궁이다.”
형광등 하나 켜져 있는 어두운 지하실엔 이름만 대도 알 수 있는 유명인들이 잔뜩 있었다.
누구보다도 눈에 띄는 한 남자.
웬만한 사람들의 2배는 될 것 같은 덩치에 조금 전 남자는 살짝 인상을 구기며 선글라스를 치켜 올렸다.
“이야···. 와일드 마몬트(Wild Mammont). 여기까지 왕림하시고. 하긴 당신까지 부름을 받을 정도의 상황이긴 하지?”
매머드라는 뜻처럼 거대한 남자는 잠시 이오시프를 바라보더니 시시한 듯 고개를 돌리고는 다시 눈을 감아버렸다.
침묵 속에서도 자신의 존재감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이 남자는 그런 고고한 태도를 취해도 그 누구도 뭐라 할 사람은 없었다.
최초의 러시안 퍼스트 각성자이며 헌터 랭크 5위에 이름을 올려놓은 샤벨리거 클랜의 클랜 마스터.
안드레이 체르노프였으니까.
“그 두 사람은? 안 온 건가? 하긴 그 마약쟁이들은 와봤자 골칫거리이려나?”
누군가를 찾는 듯 주위를 둘러보던 이오시프에게 안드레이가 먼저 물었다.
“지금 상황에 대해서 자네 생각은?”
“이런? 와일드 마몬트가 일개 크리거의 의견을 구하는 건가? 이거 영광인걸.”
이오시프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넘기며 말했다.
“블라디보스토크 항구에 게이트가 생겼다더군.”
“맞아. 두 번째 게이트지. 어떤 머저리가 파렐을 들쑤셨는지 모르지만 첫 번째가 열리고 고작 삼일만이야. 이게 말이 돼? 머리가 제대로 박힌 놈이라면 그런 짓을 하지 않을 텐데. 레베제바 같은 녀석이 또 있나 봐.”
“뭐야? 말 다 했어?!”
같은 클랜의 레베제바는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 뭐라 한마디 더 하고 싶어 입술이 들썩거렸지만 안드레이의 눈치를 살피더니 그대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금발의 짧은 머리카락이 마치 한 마리에 시베리아 호랑이를 연상케 하는 날카로운 여자였다.
“크크···.”
안드레이에게 꼼짝도 못 하는 그녀를 보며 이시노프는 어쩐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자네라면 이미 봤겠지. 어떤 녀석인지.”
자칫 건방져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그의 정보력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가끔 다른 헌터의 사냥감을 스틸해서 하이에나라는 별명이 붙긴 했지만 누가 뭐라 해도 단독으로 백병전을 수행해 파렐 7층을 깨끗하게 쓸어버린 무서운 헌터니까.
“나라면 말이야.”
이시노프는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
“당장 도망가겠어.”
“······.”
“그런 괴물을 상대하는 건 미친 짓이야.”
영국 버킹엄(Buckingham)
“그게 무슨 말인가요!”
“···일단은 대피를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대피? 총리로서 할 말인가요?”
“지금 헌터들이 막고는 있지만 만에 하나 이곳까지 위험할 수가 있기 때문에···. 여왕님의 안전을 위해서···.”
총리 윌리엄 조쉬는 어쩔 줄을 몰라 땀을 쩔쩔매며 여왕에게 말했다.
“후우···. 그래 현재 피해는 어떻게 되죠?”
“투입된 헌터 서른 명 중에 현재 열다섯이 죽었습니다. 1차 저지선이 뚫린 이상 2차 저지선에서 헌터와 군대의 통합 전선을 펼칠 예정입니다.”
“2차 저지선이라면 어디까지죠?”
“피해 범위는···. 반경 100Km. 저희 버킴엄 궁전도 포함되어있습니다.”
총리의 말에 여왕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도시가 결코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끝까지 유지하려고 했던 냉철함도 그 어마어마한 피해에 결국 다리가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폐하!”
“대피는? 그 안에 있는 시민들은 어떻게 되었죠?”
“현재 진행중이긴 하지만···. 너무나 빠르게 다가오는지라···.”
“오, 신이시여···.”
여왕은 두 손으로 얼굴을 짚었다.
“어떻게든 시민들이 대피할 때까지 저지선을 지켜야 합니다. 아셨나요?”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만···.”
총리는 쉽사리 장담하지 못했다.
그만큼 적은 강력했다.
영국은 미국 다음으로 가장 많은 수의 헌터를 보유하고 있는 헌터강국이었다.
패스파인더는 예외로 치더라도 그다음으로 가장 고층인 10층을 클리어 한 랭킹 2위의 킹덤 클랜과 함께 에이더, 세이브 퀸, 빅벤 등 무수한 클랜이 있는 나라였다.
그러나 조금 전 사상자 중 열다섯이 바로 그 대단한 킹덤 클랜의 헌터들이었다.
가장 유능하고 믿음직했던 카드가 너무나도 쉽게 종잇장처럼 찢겨 나가고 만 것이다.
“이길 수 없는건가요···.”
여왕은 한숨을 내쉬었다.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는 그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상황은 너무나도 절망적이었다.
“폐하!!!”
그때였다.
문을 박차고 비서실장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직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총리는 그의 행동에 인상을 찡그리며 소리쳤다.
“이보게, 이게 무슨 행···.”
“지, 지금 어서 TV를···!!!”
“···뭐?”
나무라는 총리의 말도 무시한 채 말하는 비서실장의 태도에 두 사람은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두 사람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탁자에 있는 리모컨을 잡았다.
황급히 TV의 전원을 누르는 순간,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믿을 수 없습니다. 지금··· 이곳에······]
미국 뉴욕(New York)
콰아앙 ―!!
미사일이 발사된 것처럼 무언가가 맹렬한 속도로 떨어졌다.
그것은 엠파이어 빌딩 옆으로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카가가각·····!!
주차되어있던 차량 수십 대가 충격으로 공중으로 솟구치고 나서야 겨우 멈추었다.
“이봐, 괜찮아?!!”
“Shit···!! 어깨가 나간 것 같아! 파렐에서 나온 지 얼마나 됐다고···.”
조금 전 하늘에서 떨어진 건 미사일이 아니다.
피투성이가 된 헌터가 욕지거리를 뱉어내며 소리쳤다.
“저런 괴물 새끼가!!”
그는 자신의 검이 완전히 부서진 것을 보고는 들고 있던 검을 바닥에 집어 던지며 소리쳤다.
“도대체 패스파인더들은 뭐 하는 거야? 파렐 안에 있으면서 저런 괴물이 밖에 나오는 동안 아무것도 안 했단 말야?”
“알벤이 없으니 어디서 숨어서 구경이라도 하나 보지.”
“제길!!”
[크르르르······.]
마치 영화 속에서나 볼 법한 거대한 거신병이 눈앞에 있었다.
엄청난 크기의 할버드를 휘두를 때마다 나무가 베어 넘어지듯 건물들이 부서졌다.
“치료해 줄 테니까 가만히 있어. 브루노.”
바닥에 착지한 힐러인 요한이 그의 부러진 어깨를 맞추었다.
가이스터(Greister) 요한이 정신을 집중하자 손바닥에서 희미한 빛이 흘러나와 브루노의 어깨를 감쌌다.
“지금까지 파렐에서도 저런 거대한 녀석은 본 적이 없는데···. 이대로는 승산이 없어.”
“조금만 버텨. 곧 지원이 올 거야.”
“지원? 누가? 데몬 클랜? 아니면 크론? 여기서 죽지 않으면 다행일걸···.”
그는 신경질적으로 자신의 머리를 헝클었다.
말을 내뱉었던 요한 역시 사실 그의 말에 동의했다.
이미 거리에는 열 명이 넘는 헌터들이 쓰러져 있었다.
하나같이 모두 다 6층을 클리어한 제법 실력 있는 헌터였다.
“제길···. 아무리 알벤이 죽었다고 패스파인더 놈들 이런 사태에도 코빼기도 안 보이는 건 너무하잖아? 지금까지 받아먹은 돈이 얼만데. 겁쟁이 치킨 새끼들!”
그는 바닥에 침을 탁 뱉었다.
피가 엉겨 붙어 붉은 침이 그의 상태가 결코 정상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도대체 어떤 놈이야? 파렐을 들쑤셔 놓은 녀석이···? 할거면 제대로 하던지 자기 분수도 모르고···.”
리더가 사라지자마자 그 폐해는 바로 나타났다.
13층의 마스터키를 얻기 위해 누군가 12층을 멋대로 공략하려 도전했던 것.
그리고 결과는 눈앞에 보이는 파수꾼.
보기 좋게 실패했다.
첫 번째 침공으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기도 전에 또다시 힐페론은 못마땅한 듯 말했다.
“어차피 이미 뒈졌을 거다. 다 쓸데없는 일이야.”
“갈수록 더 힘들어지는군···.”
요한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패스파인더는 그렇다 쳐도···. 레오스 클랜이라도 와줬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운 마음에 중얼거렸지만 불가능 한 일이었다.
자신의 클랜인 레오스는 아직 파렐에서 철수하지 않은 상태였으니까.
부상으로 참여하지 못한 요한은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파렐 안에 있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어···.”
그 말에 주위에 있던 헌터들마저도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흥, 살아남을 궁리나 하라구.”
옆에 있던 브루노가 요한의 말에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지금까지 중에 최악의 괴물이야.”
그 말에 모두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패스파인더들이 온다 해도···.”
압도적인 힘으로 절망을 가져다준 거신병.
눈앞의 괴물은 차곡차곡 처참하게 자신들을 짓밟고 있었다.
“···이길 수 없을지도 몰라.”
치료를 하던 요한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때 그의 옆에 있던 헌터 한 명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그를 불렀다.
“저기···. 요한.”
“왜 그러지?”
“저런 녀석을 혼자 상대하는 건 아무래도 무리겠지?”
그는 자기가 한 말이지만 스스로도 어이가 없는 듯 헛기침을 했다.
분위기 파악을 못 했다는 듯 요한의 옆에서 상처를 치료하던 헌터가 그를 꾸짖었다.
“지금 농담해? 네 눈으로 저 괴물을 보고도 모르겠어? 알벤이 살아 돌아온다고 해도 혼자선 불가능하다고!!”
이형석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