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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겜문학개론] 게임, 기생충에서 길을 찾다

2020년 새해를 맞아 데일리게임에서 새로운 형식의 칼럼을 준비했습니다. 인문학도의 눈으로 게임과 게임 세상 이야기를 해보는 코너입니다. 오랜 기간 게임을 즐겨온 '찐 게이머' 필자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분야와 연결된 게임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 독자 여러분께 전달할 예정입니다. < 편집자주 >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 포스터.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 포스터.
[글=신진섭 게임칼럼니스트] 여러분 혹시 눈치 채셨나요. 최근의 인기 게임들이 불법 프로그램, 핵과 닮아가고 있다는 걸요. 자동 사냥 프로그램, 방치형 플레이, 다중 클라이언트까지 모두 과거엔 영구정지감인 기능들입니다. 오늘은 핵과 싸우다 스스로 핵이 돼 버린 게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엔씨 '리니지'와 불법과의 전쟁

엔씨소프트(엔씨)의 공전의 히트작 PC MMOPRG(대규모 다중접속역할수행게임) '리니지'는 핵이라면 이를 갈았습니다. 특히 자동사냥이 가능한 매크로를 쓰는 플레이어에게 엔씨는 척살령(영구정지)을 내리길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리니지'는 캐릭터의 육성이 고되고 어렵지만 강해졌을 때 얻는 쾌감이 대단합니다. 좋은 재화를 얻기 힘든 만큼 득템에 성공했을 때 얻는 카타르시스가 큰 게임입니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야 말로 '리니지' 시리즈의 정체성이죠. '린저씨(리니지 아저씨)'들이 밤새 수북하게 컵라면과 담배탑을 쌓아가던 광경은 2000년대 PC방을 상징하는 풍경이기도 했습니다.

'린저씨'들의 밤샘력은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사진=tvN '코미디빅리그' 캡처).
'린저씨'들의 밤샘력은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사진=tvN '코미디빅리그' 캡처).
엔씨는 자동사냥, 자동플레이 기능을 지원하는 매크로를 '리니지' 생태계를 망치는 황소개구리로 취급했습니다. 24시간 자동사냥 캐릭터들로 인해 게임의 밸런스가 무너지고 공정성이 훼손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매크로 캐릭터를 이용해 게임 외부에 재화를 판매하는 작업장 세력과 맞물리면서 문제는 더 심각해졌습니다. 인게임 경제 붕괴를 막기 위해 엔씨는 핵을 잡고 또 잡았습니다. 하지만 결코 핵은 뿌리 뽑히지 않았습니다. 머리를 자르면 곧 새 머리가 돋아나는 히드라처럼 죽지 않고 결국 또 돌아오곤 했습니다.

히드라를 묘사한 고대 도자기.
히드라를 묘사한 고대 도자기.
엔씨의 핵과의 전쟁은 그야말로 눈물겨울 정도입니다. 불법 프로그램에 대한 판례 상당수가 '리니지' 때문일 정도입니다. 법으로 핵 플레이어를 근절시키기 어려웠습니다. 게임 클라이언트 내 데이터를 변조하는 해킹과는 달리 자동사냥 프로그램은 형사적으로 처벌할 근거가 마땅치 않았죠.

정보통신망법에 따르면 자동사냥 프로그램을 전달, 유포하는 자에 대한 처벌조항은 있지만 이를 직접 사용하는 사람은 처벌하기 어렵습니다. 업무방해로도 걸기 어려웠습니다. 자동사냥 프로그램이 게임서버의 운영을 방해할 정도로 대량의 신호나 데이터를 보내거나 장애를 유발해야 업무방해가 성립할 텐데 작업장이 아닌 이상 이런 경우는 드물었습니다. 결국 약관에 근거해 자동사냥 프로그램 사용자를 일일이 정지내리는 방법이 주를 이뤘죠.

◆리니지M 이후 모든 것이 변했다

[겜문학개론] 게임, 기생충에서 길을 찾다
그러다 2017년 6월 엔씨의 기조를 180도 바꿔놓는 문제작이 등장합니다. '리니지'를 모바일로 이식한 그 게임 '리니지M'입니다.

출시 전, '리니지M' 기자간담회 날을 기억합니다. 물약부터 사냥까지 완벽한 오토플레이를 지원한다는 발표에 객석이 술렁였습니다. 오토라면 이를 갈던 엔씨의 게임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습니다. 결과는 아시는 그대로입니다. '리니지M'은 출시 이후 현재까지 오픈마켓 매출 순위 최상위권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뚜껑을 열어보니 '리니지M'에는 오토플레이 그 이상의 것들이 들어있었습니다. 엔씨는 그동안 자신들이 배척하던 것들을 품었습니다. 적과의 완벽한 동침이었죠.

아니 이게 된다고(사진=AVGN)?
아니 이게 된다고(사진=AVGN)?
음지에서 거래되던 아이템은 유료 재화 거래소 안에서 합법화됐습니다. 무료 재화(아데나)가 아닌 유료 재화(다이아몬드)로만 아이템을 매매할 수 있었죠. 곧이어 자체 앱플레이어까지 만들어서 PC와 모바일의 크로스 플랫폼을 구축했습니다. 주 캐릭터와 쫄 캐릭터를 동시에 플레이할 수 있는 다중 클라이언트의 합법화나 다름없었습니다.

'리니지M'의 기록적인 성공 이후 한국 게임판은 크게 변했습니다. 음지의 프로그램들이 마치 광복절 특사처럼 양지로 나와 게임의 핵심요소로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더 이상 핵과 아이템 현금거래를 막기 위해 회사의 자원을 소모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불법 프로그램을 매출로 변환시킬 수 있는 연금술을 배우게 된 겁니다.

◆핵과 게임의 공진화, 기생충을 품은 숙주

고길동은 기생수 둘리 때문에 훗날 소드 마스터가 된다.
고길동은 기생수 둘리 때문에 훗날 소드 마스터가 된다.
핵과 게임의 관계는 기생자와 숙주의 관계와 닮아있습니다. 뱁새의 둥지에 알을 낳는 뻐꾸기, 박테리아와 생물 등을 떠올리시면 이해가 쉬울 겁니다. 얼핏 보면 숙주가 일방적으로 손해를 보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기생을 막기 위해 숙주가 진화하기도 합니다. 이기주의적인 편리공생이 결과적으로는 서로 돕는 상리공생의 결과를 낳는 겁니다. 진화생물학에서 공진화(共進化 , coevolution)라고 부르는 현상입니다.

'거울나라의 앨리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의 후속작이다.
'거울나라의 앨리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의 후속작이다.
앨리스는 여전히 조금씩 헐떡이며 말했다. "음, 우리 세상에서는 지금처럼 오랫동안 빨리 뛰었다면 보통 어디엔가 도착하게 돼요." 여왕은 말했다. "느릿느릿한 세상이군. 그렇지만 보다시피 이곳에서는 같은 자리에 있으려면 최선을 다해 뛰어야 해. 어딘가에 가고 싶다면 적어도 그 두 배 이상 빨리 뛰어야 한단다." - '거울 나라의 앨리스' 루이스 캐럴 -

미국의 생물학자 반 베일런(Leigh Van Valn)은 동화 속 이야기에 빗댄 '붉은여왕 가설(Red Queen hypothesis)'로 공진화 개념을 설명합니다. 숙주와 기생자는 막고 뚫기 위한 끊임없는 군비경쟁을 하게 됩니다. 쉽게 말하면 기생생물은 숙주의 방어벽을 뚫으려고, 숙주는 이런 기생자를 막아내려고 밤낮없이 레벨업을 해야 한다는 거죠. 어느 쪽이든 무기경쟁에서 뒤쳐지는 종은 적응도가 감소해 사라지게 됩니다. 서로 살아남으려는 생존 본능으로 인해 숙주와 기생자 모두 진화하게 되죠.

게임사와 불법 프로그램 제작자는 그야말로 창과 방패 사이다(사진=조석 웹툰 '마음의 소리').
게임사와 불법 프로그램 제작자는 그야말로 창과 방패 사이다(사진=조석 웹툰 '마음의 소리').
불법프로그램 판매자들에게 게임은 죽지 않아야 하는 숙주입니다. 게임이 잘 돼야 재화의 가치도 올라가 본인들도 수익을 얻을 수 있죠. 게임이 망하면 불법 프로그램의 가치도 휴지장이 됩니다. 그들은 게임이 망하는 걸 원치 않습니다. 자신의 이득이 최대화되길 원하죠. 이용자 데이터를 통째로 날려버리는 식의 파멸적 해킹은 시도하지 않습니다.

핵을 막으면서 게임사들의 기술은 진보했습니다. 오토 플레이어를 일반 플레이어와 구분하려면 오토가 어떻게 작동되는지 프로그램을 뜯어 봐야 되겠죠. 게임사가 핵 버전 1을 잡아내면 작업장은 다음 버전을 개발합니다. 사람과 구분되지 않게 종종 멈춰서기도 하고 심지어는 채팅도 하죠.

수십, 수백개의 오토 계정을 돌리는 작업장이 난립하자 서버에 과부하가 걸립니다. 게임사는 대규모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서버 분산 기술 개발에 집중하기 시작합니다. 적의 장점도 흡수했습니다. 힘들이지 않고 캐릭터를 육성하고 싶어 하는 이용자들의 니즈를 핵쟁이들이 알려준 거죠.

NC AI 기사 예시. 작업장의 공격에 견디기 위해 엔씨는 AI 기술을 탑재했다. AI 기사까지 만들어낼 정도.
NC AI 기사 예시. 작업장의 공격에 견디기 위해 엔씨는 AI 기술을 탑재했다. AI 기사까지 만들어낼 정도.
엔씨가 국내 게임사 중 가장 선도적인 AI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가장 치열한 핵과의 전쟁을 치르고 살아남은 엔씨가 가장 풍부한 빅데이터와 인적 자산을 갖게 된 겁니다. 10여년 전부터 50여명 규모의 AI랩을 운영하고 있었죠. 그만큼 절실했으니까요.

핵이 없었다면 게임사들의 기술력은 답보상태에 머물렀을 공산이 큽니다. 아이템 현금거래 사이트가 없었다면 현재 주매출원인 인앱결제형 상품(부분 유료화)을 떠올릴 수 있었을까요. "친구를 가까이 하라, 하지만 적들은 더 가까이 하라(Keep your friends close, but your enemies closer)." 영화 '대부2'의 주인공 마이클 꼴레오니(알 파치노)의 대사입니다. 게임회사 버전으로 바꿔보면 아마 이렇게 될 겁니다. "이용자를 가까이 하라, 하지만 핵쟁이를 더 가까이 하라."

정리=이원희 기자(cleanrap@dailygam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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