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신진섭 게임칼럼니스트] 게임 마니아라면 요즘 기대감에 밤잠을 설칠지도 모르겠습니다. 차세대 콘솔게임기인 플레이스테이션5(PS5)와 엑스박스 시리즈 X의 윤곽이 나왔습니다. 스펙을 살펴보면 면면이 화려합니다. 4K 영상을 지원하는 빵빵한 GPU(그래픽카드), 순식간에 로딩을 처리하는 SSD(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 광원을 처리하는 레이 트레이싱을 기본으로 탑재했습니다. SSD 규격도 가성비의 SATA3가 아니라 비싸고 빠른 NVMe입니다. 전 세대 콘솔인 PS4와 엑스박스 원의 스펙과 비교하면 경천동지(驚天動地)할 변화입니다.
가장 놀라운 건 가격입니다. PS5는 패키지로 구동할 수 있는 버전이 499.99 달러(국내 가격 62만8000 원), 디스크가 없는 다운로드 전용 버전이 399.99 달러(약 49만8000 원)입니다. 엑스박스 시리즈는 X와 S 두 가지 라인업으로 출시합니다. 시리즈 X보다 GPU와 D램, SSD 용량을 살짝 낮춘 시리즈S는 가격이 39만8000 원에 불과합니다.
얼마나 저렴한지 감이 안 오신다구요. 최근 엔비디아가 출시한 차세대 그래픽카드 지포스 RTX 3080이 국내서 100만 원 정도에 팔리고 있습니다. RTX 3080은 전작인 RTX 2080보다 약 더 발전된 성능에도 가격은 동일하다고 해서 전 세계적으로 가성비가 좋은 '혜자'라는 칭송을 받고 있습니다. 완전 저렴하다고 소문난 최신형 그래픽카드 하나 값이면 PS5와 엑스박스 시리즈를 둘 다 살 수 있습니다. 말이 안 되는 얘기죠.
7년 전 출시된 PS4가 399 달러였습니다. 물가상승률도 그렇거나와 요즘 램이며 낸드플래시 메모리 가격이 장난이 아닙니다. 5G 스마트폰에도 들어가는 부품이라서 몸값이 고공행진 중입니다. 경제매체 블룸버그재팬에 따르면 PS5 제조원가가 450 달러(약 53만 원) 정도라고 합니다. 유통비용을 생각하면 마이크로스프트나 소니나 9세대 콘솔을 팔면 팔수록 적자를 보게 되는 셈입니다.
◆출혈 경쟁, 승자가 모든 걸 갖는다
콘솔 게임기의 비현실적인 가격은 마이크로소프트와 소니의 치열한 경쟁 덕분입니다. 처음엔 '이게 될까' 싶었던 엑스박스가 생각보다 빨리 플레이스테이션의 판매고를 따라잡고 있습니다. 희대의 명기로 평가되는 PS4의 전 세계 누적 판매량이 1억 대 정도인데, 엑스 박스 원이 절반인 5000만 대를 팔아치웠습니다. 북미에서 인기 있는 독점작 '헤일로'를 잡은 것이 엑스박스 선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죠.
아직까진 소니가 앞서있다지만 결코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상황입니다. 9세대 콘솔은 향후 시장의 승자를 결정지을만한 분기점이 될 전망입니다. 콘솔 대대로 시장은 승자가 점유율 50% 이상을 독식하는 '위너 테이크 올'의 구조였습니다. 닌텐도가 그랬고 한때는 세가가 콘솔 시장을 지배했죠. 조금이라도 더 인기 있는 플랫폼에 서드파티 개발사가 입점하려 하고, 그 결과 더 많은 독점작을 이용자에게 제공하게 되는 '양의 되먹임' 구조가 그간 콘솔 시장의 승자를 결정지어 왔습니다. 이용자가 모일수록 입소문이 나는 '네트워킹' 효과도 막강합니다.
거기다가 양사의 전략을 살펴보면 콘솔 시장에 몇 가지 변곡점이 오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당장의 영업이익보다 점유율 확보에 집중하는 모습입니다.
◆소유와 플레이의 '디커플링'
그간 콘솔 제조사들의 주된 수입원은 패키지 판매에서 나오는 수수료였습니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구미가 당기는 독점작과 합리적인 가격의 콘솔로 안방을 공략했습니다. 콘솔 기기에서 나는 적자를 패키지 판매 수수료에서 메꾸는 구조죠.
마이크로소프트는 여기에서 한 발짝 더 나갔습니다. 게임기를 사지 않아도 엑스박스 생태계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월 4만 원을 내면 엑스박스 시리즈 X를 빌려주고 여기에 '마인크래프트 던전스', '포르자 호라이즌4', '헤일로 인피니트', '검은사막' 등 100여종의 게임을 클라우드를 통해 플레이할 수 있습니다. 더 놀라운 건 24개월 동안 구독을 유지하면 기기를 제공하는데, 클라우드 게이밍을 포함한 할부가격이 기기만 일시불로 구매하는 것보다 저렴하다는 겁니다.
소니라고 손 놓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구독형 서비스인 'PS 플러스 컬렉션'에 가입하면 PS5 기계에서 PS4 '갓 오브 워', '블러드 본', '몬스터 헌터 월드', '파이널 판타지15', '폴아웃4', '언차티드4' 등 명작들을 플레이할 수 있습니다. 워낙 유명하고 잘 만들어서 지금도 몇만 원씩은 줘야 살 수 있는 게임들입니다. 소니의 메시지는 명확합니다. '플스도 처음이고 패키지 사기도 부담스럽지? 걱정하지마. 공짜로 다 풀어줄게. 근데 한 번 하면 후속작 안사고는 못 베길 걸?'
테이셰이라 하버드 경영대학원 교수는 이러한 혁신 방법을 '디커플링(해체하기, 끊어내기)'이라고 표현합니다. 게임기를 사고 소매점에서 패키지를 사야 한다는 콘솔 게임의 '가치사슬(Value Chain)'에 변화가 생긴 셈입니다. 목돈이 없이도 넷플릭스를 구독하듯 한 달에 몇만 원만 내면 콘솔 게임을 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린 겁니다. 기존 콘솔 이용자 뿐 아니라 콘솔에 낯선 이용자들을 생태계에 포섭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니의 경쟁사는 애플이다
콘솔 게임의 디커플링은 단순한 판매촉진 전략 그 이상입니다.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달라진 게임 생태계에 적응하려는 시도이기도 합니다. 콘솔 게임은 플랫폼의 고립이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않으면 앞으로의 생존을 담보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콘솔 게임이 태동했던 1970년대와는 달리 게임기는 사방에 널려있습니다. 누구나 들고 다니는 핸드폰이 그렇습니다. 이용자가 체감하는 모바일게임의 진입비용은 0에 수렴합니다. 다운로드해서 플레이하는 데 별도의 비용이 들지 않습니다. 더 강해지거나 빠른 플레이를 원하는 이용자만 선택적으로 비용을 내는 방식입니다. 재주는 개발사가 부리지만 가장 큰 이득을 챙기는 건 애플과 구글이라는 플랫폼 홀더입니다.
방마다 하나씩 있는 PC는 콘솔 저리가라 할 정도의 성능을 자랑합니다. 콘솔에서 성공한 게임들은 얼마 안 가 PC로 이식되곤 합니다. 콘솔을 고집해야 할 이유가 상당부분 사라졌습니다. PC게임 플랫폼 권력은 세계 최대의 ESD업체 밸브의 스팀이 쥐고 있습니다. 여기에 에픽게임즈 스토어, EA의 오리진, 유비소프트의 유플레이 등은 하루에 몇 개씩 무료 게임을 뿌려가며 이용자를 유혹하죠.
콘솔에 아직까진 독점작이란 메리트가 있다지만 약발이 언제까진 갈진 미지수입니다. 서드파티 개발사들이야 가장 많이 팔리는 플랫폼으로 옮겨가는 것이 당연하니까요. 이전까지야 북미‧일본의 막강한 콘솔게임 소비력을 바탕으로 시장이 유지됐지만 상황은 급변하고 있습니다. 모바일과 PC게임 시장 성장세는 콘솔을 앞질렀습니다.
통신 기술의 발달로 급부상한 클라우드 게임 서비스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기기의 성능에 구애받지 않고, 핸드폰에서도 콘솔 게임을 구동할 수 있습니다. 시간의 문제일 뿐 이론상으론 TV(모니터)만 있으면 플스가 없어도 플스 게임을 하는데 문제가 없습니다. AAA급 풀프라이스 게임 생태계에서 콘솔 게임기의 존재의미가 시험대에 올랐습니다. 패캐지 게임 통행세를 걷던 기존 수익모델에 먹구름이 낀 거죠.
◆게임이 아니라 습관을 잡아야 하는 시대, 특이점은 온다
시야를 조금 더 넓혀보면 콘솔의 생존투쟁이 더 각박한 상황에 처해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세상에 즐길거리가 너무 많아졌습니다.
전기가 들어오기 전에는 밤과 잠은 같은 말이었습니다. 케이블 방송이 나오기 전에는 12시가 되면 모두 신데렐라처럼 놀이를 끝내야만 했습니다. 넷플릭스가 등장하니 24시간 365일을 쳐다봐도 콘텐츠가 고갈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너무 많아 뭘 볼지 선택장애가 올 정도죠. 넷플릭스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머무는 곳이 선택화면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을 정도니까요. 유튜브는 어떻습니까? 광고만 보면 아무리 많은 영상을 틀어도 공짜입니다. 역사상 가장 놀기 좋은 시대가 찾아왔습니다.
콘텐츠 기업 입장에선 가장 치열한 경쟁을 해야 되는 시대죠. 지구촌이 한 시장으로 묶여서 창작자 수천만 명이 모니터와 스마트폰 화면을 놓고 '날 좀 보소'라며 외치는 형국입니다. 이용자들은 잔인할 정도로 현명합니다. 조금이라도 비싸거나 지루한 콘텐츠에 대한 인내심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가장 저렴하고 재밌는 콘텐츠만 살아남습니다. 콘텐츠를 판매하기 위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장입니다.
물론 콘솔게임이 게임 마니아에게 어필하는 장점들은 분명 존재합니다. 게임패드가 주는 조작감은 마우스와 분명 차별화되고 카카오톡이 명멸하는 모바일게임이나 PC게임과는 달리 콘솔에선 오롯이 게임에만 집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향후 수익을 책임져줄 자라나는 청소년들, 라이트 이용자, 콘솔이 익숙하지 않은 신흥시장에서는 결코 우위를 담보할 수 없는 특징들입니다.
콘텐츠 기업의 생존을 담보해 줄 강력한 통치자 '리바이어던'은 바로 플랫폼입니다. 지속적으로 사람들의 시간을 소비하는, 매일 접속하는 습관을 형성한 자가 시장을 지배합니다. 플랫폼을 구축하지 못한 사람들은 막대한 통행세를 뜯겨가며 부스러기에 만족해야 하는 시대가 찾아오고 있습니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에픽게임즈와 애플‧구글 간의 공방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9세대 콘솔의 구독형 모델과 클라우드 게임, 저렴한 게임기 가격 역시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진화입니다. 목이 긴 기린만 살아남았듯이, 콘솔도 변화하지 않으면 고사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느껴집니다.
◆온라인 RPG 중심 한국 게임, 변화의 파도 탈 수 있을까
한국에서 콘솔 시장은 급성장하는 추세입니다. PS4와 엑스박스 원이 나온 2013년, 닌텐도 스위치가 나온 2017년에 성장률이 가팔랐습니다. 최근 5년간 한국 콘솔 시장 성장률은 40%에 달합니다.
PS5와 엑스박스 시리즈 X의 파도는 이전보다 더 거셀 것으로 예상됩니다. 더 좋고, 더 싸고, 즐길거리도 많아진데다 기기의 한계도 탈피하고 있는 중이니까요. 모바일게임만 하던 주위 사람들도 이번엔 분위기가 좀 다릅니다. 코로나19 이후로 외출을 삼가는 '집콕' 문화도 콘솔에 대한 관심 증가에 한몫한 듯합니다.
국내 유명 게임사들이 올해 하반기 줄줄이 콘솔게임 출시를 예고했습니다. 개발 경력이 수십년 차이가 나는 후발주자인 한국이 과연 콘솔게임 시장에서 얼마만큼의 성과를 거둘 수 있을까요. 아시아권에 집중된 수익구조를 넘어 파이를 키우려면 콘솔에 도전해야 한다는 걸 모르지 않지만 많은 게임사들이 현실의 벽에 부딪혀 그동안 수차례 좌절한 경험이 있습니다.
기회이자 위기입니다. 콘솔 시장에서 별다른 성공작이 없다는 이유로 게임 마니아 사이에선 한국 게임사들이 다소 평가절하되는 감이 있습니다. 게임사 내부에서도 콘솔의 벽을 넘겠다는 목소리는 있었지만 수익실현 가능성을 따지다가 모바일로 축이 쏠리곤 했습니다. 주변 상황이 등 떠밀고 있는 격이지만 파도를 견디고 넘어선다면 한국 게임이 한 단계 성장하는 발판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정리=이원희 기자 (cleanrap@dailygam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