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황야의 만남 (2)
청년이 잔뜩 흥분하면서 물었다.
그러자 건기는 검날로 살짝 그의 목을 눌러 강제로 진정시켰다.
“워워, 워. 깝치면 죽는 거야.”
청년은 흥분을 억누르기 위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를 대신해 중년이 건기에게 물었다.
“원하는 게 뭐지?”
“별거 아니야. 오늘 오전에 광산 하나가 털렸거든. 혹시 누구 소행인지 알아?”
“그, 글쎄?”
“그을쎄에?”
건기는 배시시 웃었다,
그리고 중년의 목도 검날로 살포시 눌렀다.
중년은 온몸을 떨면서 다급하게 외쳤다.
“그, 그만! 우린 아무것도 몰라. 정말이야. 맹세할 수 있어!”
맹세?
건기는 그의 변명이 가소로웠다.
“그래? 그럼 왜 너희 몸에서 피 냄새가 나는지 설명해 줄래?”
피 냄새.
그 말에 청년과 중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리고 청년이 입을 열었다.
“너 설마 그 광산에 있던 무리의 생존자냐?”
“그렇다고 해 두지. 근데 난 피를 적게 보는 걸 좋아하거든. 어쩔래? 아까 털어먹은 거 다 토해 낼래? 아님 그냥 모가지가 따질래?”
건기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리고 양손에 든 검을 앞뒤로 움직였다.
검날은 그대로 두 사람의 살갗을 파고들었다.
회를 뜨듯 살갗이 떠지고, 목에서 가느다란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그, 그만! 알았어. 알았다고!”
중년은 얼른 자신의 인벤토리를 열었다.
건기는 그런 그에게 경고했다.
“미리 말해 두겠지만, 인벤토리에 숨겨 놓은 무기를 꺼내서 어떻게 해 보겠단 생각은 버리는 게 좋을 거야. 아무리 굼떠도 무기를 꺼내는 것보단 목이 떨어지는 게 더 빠르거든.”
“알고 있어. 걱정 마.”
건기는 중년의 뒤에서 그가 연 인벤토리를 함께 보며 일일이 그 목록을 확인했다.
그리고 솔직한 감상을 말했다.
“알뜰하게도 터셨네.”
중년은 인벤토리에서 구슬과 돈을 잔뜩 꺼내 땅바닥에 내려놨다.
상당한 양의 액수.
건기는 기쁘기도 하면서, 동시에 화가 났다.
“너는?”
이번엔 청년의 차례.
그러자 그도 한숨을 푹 쉬면서 중년을 따라 자신의 물건을 땅바닥에 쏟아 냈다.
“좋아. 아주 멋져.”
“이제 우리를 놓아줘.”
중년은 애원하듯 말했다.
청년도 이를 갈면서 그의 말에 맞장구쳤다.
“우리는 망보는 사람일 뿐이야. 우릴 놓아주면 다른 동료들이 어디 있는지 알려 줄게.”
한심한 새끼들.
건기는 청년의 입에서 ‘동료’란 말이 나오자마자, 그들을 더욱 하찮게 여겼다.
그들은 죽일 가치도 없었다.
“약속하지. 손가락으로 방향만 가리켜.”
청년은 손을 뒤로 뻗어 흙산을 가리켰다.
건기는 곁눈질로 보면서 물었다.
“저 흙 속에?”
“안에 숨겨진 공간이 있어. 입구는 우리가 앉아 있는 곳에서 왼쪽으로 약 2m 정도 떨어진 지점에 있어. 땅을 더듬으면 위장막을 찾을 수 있을 거야.”
“좋아. 훌륭한 대답이야.”
건기는 두 사람의 목에서 천천히 검을 뗐다.
그러나 그것은 페이크.
재빨리 팔을 움직여 각각 두 사람의 한쪽 허벅지를 벴다.
“크악!”
“크윽!”
두 사람은 허벅지를 붙잡고 땅바닥을 뒹굴었다.
건기는 그런 두 사람의 등에 검날을 문대서 피를 닦았다.
“내가 여기 오는 길에 보니까, 여기서 우측 방향으로 1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마을이 있더라고? 거기가 어딘지 알고 있겠지?”
중년은 피가 흐르는 허벅지를 손으로 억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래. 알고 있어.”
건기는 검으로 중년의 허벅지를 가리켰다.
“마을에 가서 치료를 받으면 살 수 있을 거야. 동맥이었다면 몇 분 만에 요단강이지만, 정맥은 좀 다르거든. 일부러 봐준 거니까, 가서 치료 받아서 살아 봐. 어서!”
건기는 검날의 옆면으로 툭툭 두 사람의 등을 두드렸다.
둘은 굴욕과 고통이 섞인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건기를 노려봤다.
“우리가 스킬을 쓰면 너 하나 정도는 충분히 죽일 수 있어!”
청년은 마지막 발악인 양 으름장을 놨다.
그러나 건기는 폭소는 터뜨렸다.
“스킬을 쓴다고? 내가 순순히 죽어 줄까? 내가 10분만 버텨도 마을로 가는 동안 과다출혈로 죽을걸? 싸우면 사망 확정이야.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도 없을 텐데?”
“흥! 우리 동료 중엔 마을까지 단숨에 갈 수 있는 스킬을 가진 녀석이 있어. 그러면…….”
방금 동료를 판 청년의 입에서 또 ‘동료’란 말이 나왔다.
건기는 또 폭소가 터지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너희는 떨거지잖아? 그래서 망보는 중 아니야? 떨거지를 위해서 자기 스킬을 공개하는 위험을 감수한다고? 정말?”
“이, 이……!”
청년은 분함을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이미 답은 나와 있었다.
보다 못한 중년이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가자. 이럴 시간 없어.”
두 사람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마을을 향해 다리를 쩔뚝였다.
떠나기 전 중년은 마지막으로 건기에게 물었다.
“이름이 뭐지? 이 부근에선 처음 보는 얼굴인데?”
사실 대답할 의무는 없었다.
그러나 건기는 이 머저리들에게 굳이 자신을 숨기고 싶지 않았다.
“이건기. 너희들은?”
“난 로스, 이쪽은 김촌상이다. 너도 위에서 내려온 거냐?”
너‘도.’
건기는 그 말을 듣고 확신했다.
“글쎄? 그렇다고 치지 뭐.”
“재수 오지는 날이군.”
두 사람은 갈대밭을 떠났다.
혼자 남은 건기는 땅에 떨어진 구슬과 돈을 챙겨서 인벤토리에 넣었다.
그리고 쌍검을 공중에 휘두르며 검 쓰는 감각을 일깨웠다.
“막 쓰기 편한데?”
건기는 검 하나는 인벤토리에 넣고 다른 하나는 손에 든 채 로스가 알려 준 지점으로 갔다.
그리고 검으로 지면 여기저기를 찔러댔다.
“오오!”
로스의 말마따나 지면과 비슷한 색의 위장막이 검 끝에 걸렸다.
건기는 검으로 위장막을 걷었다.
그리고 고개를 내빼서 위장막 아래 구멍을 내려다봤다.
지하로 연결된 땅굴은 조금 아래로 내려가다가 흙산을 향해 꺾여 있었다.
“무슨 비밀 기지야?”
건기는 조심히 땅굴로 들어갔다.
안은 완전히 암흑천지.
반대편 출구에서 희미한 불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안에다가 살림이라도 차렸나?”
건기는 천천히 출구로 다가갔다.
빛이 가까워질수록, 그의 귀에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대화 소리였다.
“이번엔 우리 목을 노리는 현상금 사냥꾼이 없어서 좀 심심했어!”
“경호원으로 고용할 돈이 없었나 보지. 녀석들은 오직 돈으로만 움직이니까…….”
“이제 그 수정산으로는 더 이상 광부들이 오지 않을 거야. 다 죽었으니까!”
세 목소리는 쾌활하게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건기는 통로 끝 그림자에 몸을 납작 엎드렸다.
그리고 비밀 공간을 살폈다.
군데군데 놓인 양초.
흙을 뭉쳐 빚은 가구.
그리고 사방에 쌓인 술병.
세 남성은 만취한 상태로 의자에 앉아 수다를 떨고 있었다.
건기는 흥미롭게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밖에 있는 두 사람도 들어와서 같이 마시자고 할까? 그쪽도 피곤하긴 마찬가지잖아.”
“그 둘이 한 거라곤 광부들을 고문한 것뿐이잖아? 숨통을 끊은 건 우리들이고 말이야. 나중에 마실 걸 조금 챙겨 주면 돼.”
“흥!”
얼굴에 큰 흉터가 있는 남성이 콧방귀를 뀌자, 다른 두 남성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일당의 두목 격인 리치.
그는 이를 갈면서 술병을 들이켰다.
“마일, 글랙! 너희 둘 다 아직 한참 멀었어. 그런 녀석들은 소모품이야. 그걸 명심해.”
잘생긴 쪽이 마일.
안경을 낀 쪽이 글랙.
두 사람은 리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건기의 눈은 매섭게 그를 살폈다.
떡 벌어진 어깨.
두꺼운 목.
탄탄한 옆구리.
우람한 팔근육.
허리만 한 다리.
그야말로 인간 흉기가 따로 없었다.
“물론 일반인 기준에서지만…….”
건기는 찡긋 웃으며 어둠 속에 몸을 숨겼다.
상대가 술을 마시고 있다면, 취기에 쓰러질 때까지 기다리는 게 상책이었다.
몇 시간 뒤.
그리고 마탑 10층.
“음, 음…… 마시자, 마셔…… 후후…….”
세 악당은 완전히 술에 취해 잠이 들었다.
굴속에 숨어 있던 건기는 스르륵 어둠 속에서 나와 흙산 비밀 공간에 발을 디뎠다.
“이제 이것들을 어떻게 한다?”
흙탁자에 엎드려 자고 있는 세 사람.
셋 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 술 냄새를 풀풀 풍겼다.
“후후후.”
건기는 인벤토리에서 밧줄을 꺼내 두 사람을 꽁꽁 묶었다.
그 후 따로 올가미를 만들어 둘의 목에 걸었다.
각성자에겐 아무리 신체가 구속되어 있어도 스킬이란 변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좋았어.”
건기는 뿌듯한 심정으로 세 악당을 쳐다봤다.
아직까진 그의 계획대로였다.
“가장 먼저…….”
건기는 검으로 리치의 목을 단번에 그었다.
검이 빠르게 동맥을 베면서 리치의 눈이 번쩍 뜨였다.
“케, 케엑! 너, 넌 뭐야? 이 자식……!”
“쉬이이잇.”
리치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건기는 손으로 그의 입을 틀어막으며 바닥에 눕혔다.
외견으로 볼 때 근력은 분명 리치 쪽이 더 높을 터.
그러나 목이 베인 상태에서 제대로 힘을 끌어낼 기량이 그에게 없었다.
애초에 그 정도였다면, 10층으로 내려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커윽, 커윽…….”
리치는 순식간에 다량의 피를 흘리며 정신을 잃었다.
부들부들 떠는 그의 몸은 필사적으로 죽음에 저항했다.
“다음은…….”
건기는 인벤토리에서 생수병을 꺼냈다.
그리고 마일의 얼굴에 물을 부어서 깨웠다.
“윽, 차거!”
마일이 스르르 눈을 떴다.
그는 갑작스럽게 느껴진 구속의 감각에 화들짝 놀라며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리치 형님은? 글랙은? 너, 넌 누구야? 뭐 하는 놈이야!”
“저 녀석 이름이 리치야?”
건기는 싸늘하게 식은 리치를 가리켰다.
그리고 씩 웃으며 말했다.
“형님 만나고 싶으면 언제든 이야기해. 솔직히 나도 녀석을 바로 죽이고 싶은 마음은 없었어. 하지만 녀석 같은 타입은 죽일 수 있을 때 바로 죽여 놓지 않으면 나중에 귀찮아지거든.”
마일은 너스레 떠는 건기를 보며 경악했다.
“넌 누구야! 뭐 하는 놈이야?”
“그냥 지나가던 광부야.”
“광부? 그, 그럼 아까 우리가 턴 광부 녀석들의 동료냐? 복수하러 온 거야?”
건기는 아까 밖에서 만난 2인조를 포함해 이 일당이 우스웠다.
악당임에도 이들은 하나같이 환장할 정도로 멍청한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복수보단 물질적인 이유가 더 크지. 갖고 있는 거 싹 다 내놔.”
건기는 죽은 리치를 보며 과연 그의 인벤토리에 무엇이 들어 있었을지 의구심이 들었다.
그러나 그가 죽은 이상 그의 인벤토리는 영구적으로 소멸.
당연히 그 안에 들었던 물건들도 자동 소멸되었다.
물론 거기에는 시스템적으로 숨겨진 비밀이 하나 있는데,
그것을 아는 사람은 건기를 포함해 마왕 단 둘뿐이었다.
다만 지금의 건기는 그 비밀을 당장 이용할 수 없었다.
어쨌든 일반적인 경우,
각성자 스스로 인벤토리를 열어 안에 보관한 물건을 꺼내도록 고문하거나, 협박해야만 했다.
“소, 손을 쓸 수 있게 풀어 주면 꺼낼게.”
“좋아.”
건기는 마일의 손을 풀었다.
그러자 마일은 입술을 비틀면서 인벤토리를 열고 거기서 다양한 물건들을 빼냈다.
구슬, 돈, 식량, 물, 거기에 각종 무기와 도구가 쏟아져 나왔다.
“잡동사니밖에 없잖아?”
“귀, 귀중한 물건은 전부 리치 형님이 갖고 있었어. 정말이야!”
“알았어. 믿어 줄게. 이게 다야?”
“그래.”
건기는 아무 미련 없이 검 손잡이로 그의 관자놀이를 후려쳤다.
마일은 신음 소리 한 번 내지 못하고 기절했다.
“다음은…….”
건기는 두 번째로 글랙의 머리에 물을 부었다.
“어푸, 어푸!”
“뭐라는 거야?”
건기는 미간을 찌푸리며 주먹으로 글랙의 머리를 내리쳤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글랙이 눈을 떴다.
“뭐, 뭐야? 넌 뭐 하는 놈이야?”
건기는 피식 웃으며 마일에게 했던 이야기를 한 번 더 말했다.
그리고 그 역시 손을 풀어 주고, 인벤토리를 열게 했다.
“어디 보자, 물건이…….”
글랙은 일부러 늦장을 부리며 곁눈질로 건기를 노려봤다.
그리고 그런 그의 눈에 건기가 재채기를 하는 게 보였다.
“핑거 넷!”
스킬 시전.
글랙의 오른손 엄지를 제외한 네 손가락 끝에서 가느다란 실이 뿜어져 나왔다.
개울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