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비자금 강탈 (1)
“설마 이건기, 그 개새끼가 우리를 노리진 않겠지?”
“애들 말로는 현재 41층이고, 곧 이쪽으로 올라온다고 합니다. 근데 저희랑은 마주칠 일 없을 겁니다.”
“왜지?”
데미언은 손에 쥔 술잔을 흔들어 위스키가 찰랑이게 했다.
“듣자 하니, 40층 길드에서 이건기한테 무슨 소포를 맡겼다고 합니다. 목적지는 길드 본부고요.”
“그래? 그럼 우리 층은 그냥 알아서 지나가겠군?”
데미언은 기쁜 마음으로 위스키를 마셨다.
지태도 그가 한시름 놓은 것을 보고는 맥주를 들이켰다.
“으아아악!”
어디선가 들려오는 비명 소리.
그것은 음악 소리에 묻히지 않고 점점 더 커졌다.
데미언은 마침 잔이 빈 참에 술잔을 바닥에 던져 깨뜨렸다.
“어떤 놈이 기분 잡치는 소리를 내는 거야?”
보스의 호통.
그 소리에 음악이 멈추고,
모두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러나 비명 소리는 계속 들렸다.
“가서 보고 오겠습니다.”
지태는 부하들을 데리고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갔다.
그리고 거기서 테이블에 앉아 있는 한 방문자를 발견했다.
“아이고, 이게 누구…….”
지태가 인사를 하기도 전에,
방문자는 손에 든 마총으로 그의 미간을 겨눴다.
“오랜만이야, 차지태.”
지태는 양손을 들면서 방문자의 인사를 받았다.
“저도 반갑습니다, 딕 형님.”
딕.
그는 마총을 치우며 씩 웃었다.
그리고 테이블 아래를 가리켰다.
그의 발아래, 한 남자가 밟히고 있었다.
그게 바로 비명 소리의 정체였다.
“끌고 오느라고 힘들었어. 입만 열면 거짓말이더라고.”
“이 새끼!”
지태는 남자의 멱살을 잡아 단숨에 들어 올렸다.
“우리 돈을 가로채고서도 무사할 줄 알았냐? 엉!”
지태는 남자를 끌고 가 데미언 앞에 내려놨다.
데미언도 남자를 알아보고는 흥분해서 그를 발로 찼다.
“개자식!”
데미언은 한동안 그를 갖고 축구연습을 했다.
발끝, 발등, 발바닥, 뒤꿈치.
할 수 있는 모든 동작으로 그에게 충격을 줬다.
그러나 그것은 오래가지 않았다.
전력을 다한 동작을 계속 행하기에 그의 몸은 너무 비루했다.
“헉, 헉…….”
데미언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곧 지태가 의자를 갖고 왔고, 그는 거기 앉았다.
“일으켜 세워.”
데미언의 명령에 부하들은 남자를 붙잡아서 세웠다.
“그래. 지금부터 내가 묻는 말에 순순히 대답하는 게 좋을 거야. 내 돈 어디 있어?”
남자는 울먹이면서 뭔가 열심히 대답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마탑 공용어인 한국어가 아니라 독일어였다.
“빌어먹을! 내가 왜 한국말도 못하는 회계사를 고용했지?”
데미언은 부하들을 살피며 다급히 누군가를 찾았다.
“통역하던 자식 어디 있어?”
“그놈, 저번 주에 죽었는데요?”
“죽었어?”
“네. 엘프들한테 당했습니다.”
“젠장! 너희들은 제2 외국어로 독일어 안 배우고 뭐 했어!”
데미언은 손바닥으로 이마를 탁 쳤다.
회계사가 가로챈 돈은 백억.
그의 속이 바짝 탈 만했다.
그때 딕이 그의 앞에 걸어왔다.
“제가 통역해 드릴까요?”
“오오! 동생이? 그럼 고맙지.”
딕은 유창한 독일어로 회계사에게 무어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회계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은 문장을 계속 말했고,
그것을 알아차린 데미언이 딕에게 물었다.
“뭐라고 하는 거지?”
“자기는 결백하다고 하는데요?”
“뭐라고!”
데미언이 주먹을 쥐어서 올리자,
부하들이 일제히 마총을 꺼내 회계사를 겨눴다.
“다시 물어봐.”
딕은 회계사와 다시 이야기를 나눴다.
이번에도 회계사는 뭔가 같은 말을 반복하며 울먹였다.
당최 두 사람의 대화를 알 수 없던 데미언은 답답한 마음에 직접 리볼버를 빼 들었다.
“뭐라고 했지?”
딕은 어깨를 으쓱였다.
“자기는 쥐꼬리만 한 월급을 받으면서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고 합니다.”
“그건 내 알 바 아니야!”
데미언은 씩씩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회계사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미간에 직접 총구를 댔다.
“다시 한 번 물어봐.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으면 내가 손수 이승을 하직하게 해 주지.”
딕은 한숨을 쉬면서 세 번째로 회계사에게 물었다.
그러자 회계사는 눈물을 펑펑 흘리며 또 다른 문장을 반복했다.
데미언은 리볼버의 안전장치를 풀면서 딕에게 물었다.
“뭐라고 했지?”
딕은 미간은 찌푸리고, 입술은 찡그리며 대답했다.
“그대로 전달해 드리죠. ‘당신은 직접 방아쇠를 당길 배짱 같은 건 없는 인간이야, 이 게으른 돼지야.’라고 했습니다.”
팡.
광선이 회계사를 미간을 뚫고 들어가 뒤통수로 나왔다.
데미언은 죽은 회계사에게 침을 뱉은 뒤 마총을 집어넣었다.
“쓰레기 같은 자식. 내가 얼마나 잘해 줬는데, 감히 날 모욕해? 당장 이거 치워!”
지태는 부하를 시켜 시체를 그의 인벤토리에 넣은 후 즉시 엘프의 영역으로 떠났다.
시체를 버리기에 거기보다 더 좋은 곳은 없었다.
데미언은 딕에게 어깨동무를 하면서 부하를 향해 손짓을 했다.
그러자 부하들은 서둘러 두 사람에게 술이 담긴 잔을 대령했다.
“자네한텐 신세를 졌군.”
두 사람은 짤랑 잔을 부딪쳤다.
데미언은 술잔을 들이킨 후 딕에게 말했다.
“비록 난 화이트 클랜 밑에 있고 자네는 옐로우 클랜이지만, 만약 자네가 교수를 끌어내릴 생각이라면 브라운 클랜은 언제든 자네 편에 설 거라네.”
딕의 야심.
그것은 알 만한 사람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딕은 데미언을 향해 미소 지으며 잔을 들었다.
“감사합니다.”
다시 술집 분위기는 혼돈의 도가니로 돌아가고,
데미언은 연거푸 딕과 술을 마시다가 어떤 이야기를 꺼냈다.
“자네, 이건기라고 아나?”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어떤 겁대가리 없는 애송이인데, 혼자 블루 클랜을 박살 냈어. 정말 몰랐나?”
블루 클랜은 옐로우 클랜 산하.
옐로우 클랜의 간부인 딕이 모른다는 것은 말이 안 됐다.
하지만 정말로 딕은 건기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그의 관심은 어디까지나 교수와 옐로우 클랜일 뿐,
나머지는 부수적인 것이었다.
“그건 알고 있었죠. 하지만 블루 클랜은 용병 없인 그저 동네 양아치에 불과하잖아요? 저희에겐 그리 큰 타격이 아닙니다.”
블루 클랜은 어디까지나 판매책.
모래가루의 생산은 다른 클랜이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니 새로운 판매책을 찾으면 그만이었다.
“그렇군. 하지만 그래도 리텐밍이 장사 수완은 꽤 좋았지. 거주 구역에서 약 파는 일은 그 녀석이 최고였을걸?”
“그건 그렇죠.”
딕은 건기의 이름을 머릿속에 새겼다.
그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진 것을 본 데미언은 한마디 덧붙였다.
“지금 41층에 있어. 어때? 가서 잡아 보겠나?”
“아니요. 그런 조무래기 따위는 신경 쓸 가치도 없죠.”
딕은 잔을 테이블에 내려놨다.
“그만 가 보겠습니다.”
“벌써?”
“네. 클랜에 일이 좀 있어서요.”
딕은 홀로 고급 주점을 나왔다.
그리고 41층으로 내려갔다.
***
반나절, 또는 몇 시간 뒤.
그리고 마탑 41층.
딕의 목적지는 41층 길드 건물.
그는 거기서 ‘버키’란 이름의 상담원이 있는 창구를 찾아갔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버키는 친절하게 딕을 맞았다.
딕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바이스부어스트.”
암호를 들은 버키의 두 눈이 커지며, 동공이 떨렸다.
“도, 돈을 받으러 온 겁니까?”
“그런 셈이지.”
“어, 어느 계좌로 송금할까요?”
“현금으로 줘. 지금 당장.”
“잠깐만요.”
버키는 창구를 닫은 후 상사에게 외출을 허락받았다.
그런 다음, 딕을 데리고 길드 건물 뒤쪽 조용한 골목으로 갔다.
“바로 꺼내서 넘겨드릴 테니까, 인벤토리 열어 두세요.”
버키는 자신의 인벤토리에서 돈이 가득 든 쇼핑백들을 꺼내 딕에게 건넸다.
딕은 쇼핑백을 받은 족족 자신의 인벤토리에 넣었다.
쇼핑백 하나에 약 3억.
이십여 개의 쇼핑백이 두 사람 사이를 오갔다.
“이게 다예요.”
“웃기지 마. 다해서 80억밖에 안 되잖아! 나머지 20억도 내놔!”
딕은 인벤토리에서 검을 꺼내서 버키를 겨눴다.
버키는 겁에 질린 채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처음에 약속할 때 20억은 제 몫이었어요.”
“그건 내 알 바 아니야.”
딕은 검을 움직여 검날로 버키의 목을 눌렀다.
그러나 버키는 입을 꾹 다문 채 인벤토리를 닫아 버렸다.
“그게 네 선택이란 말이지?”
베려는 순간,
골목 입구에서 인기척이 났다.
딕은 얼른 검을 집어넣고,
지나가는 세 사람을 쳐다봤다.
한 명은 애송이.
한 명은 꼰대.
다른 한 명은 베테랑.
딕은 셋 중 가장 베테랑처럼 보이는 청년을 관찰했다.
“햐햐햐햐! 드디어 우리도 편하게 여행하는 거냐?”
“아무래도 마굴에선 거주 구역 위주로 다니는 게 좋겠더라고요.”
굳은살이 받힌 손바닥.
자잘한 흉터가 많은 목.
두꺼운 허벅지.
차갑고 날카로운 눈매.
분명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심지어 상대도 자신을 관찰하는 딕을 곁눈질로 관찰하고 있었다.
건기와 딕.
둘은 서로 상대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쳇.”
딕은 버키를 잡아 속삭였다.
“운 좋은 줄 알아.”
딕은 즉시 골목을 이탈.
세 사람의 반대 방향으로 달렸다.
딕의 뒷모습을 본 건기는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휴우.”
“왜 그래?”
태구는 눈썹을 찡그리며 점점 멀어지는 딕을 가리켰다.
“아는 사람이야?”
“아니요. 하지만 모르는 게 더 나은 부류예요.”
건기는 사실 딕이 누군지,
보는 순간 알아본 상태였다.
옐로우 클랜의 2인자.
왜 그런 놈이 혼자 뒷골목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을까?
건기의 시선은 자연스레 버키에게 꽂혔다.
딕과 대화를 나눴다는 건 분명 뭔가 구린 게 있단 뜻이었다.
아무리 악당이라도, 딕 정도의 거물이면 사소한 시비나 삥 뜯기는 절대 하지 않는 법이었다.
“아저씨, 그리고 윌리야.”
건기는 벌벌 떠는 버키를 보면서 두 사람에게 각각 골목 양쪽 끝을 지키게 했다.
두 사람은 즉각 골목 양끝으로 흩어져 망을 봤다.
“안녕하세요?”
건기는 활짝 웃으며 버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웃는 얼굴로 그의 멱살을 잡았다.
버키의 눈동자.
그는 거기서 두려움을 읽었다.
만약 그가 딕에게 협박당하는 것이었다면, 다른 감정이 읽혔을 것이다.
건기는 버키가 딕과 공범 관계임을 확신했다.
잠시 후.
“으으으윽.”
재갈 물린 버키의 신음 소리.
건기는 그의 명치에 몇 번이고 주먹을 꽂았다.
가볍게 지른 주먹이지만,
부위가 부위다보니 그 파급력이 남달랐다.
“사실대로 말해. 정보만 알려 주면 바로 풀어 줄게.”
“으으으윽!”
버키는 눈물을 글썽였다.
건기는 그런 그의 눈을 보면서 이번엔 옆구리를 때렸다.
아까와 달리 묵직하게 꽂힌 주먹에 버키는 신장이 폭발하는 것 같았다.
“말 안 해?”
“끄으으윽.”
비명 아닌 비명.
건기는 다음으로 버키의 사타구니를 때렸다.
한 대, 두 대, 세 대.
버키는 눈앞이 핑핑 돌았다.
“왜 알이 두 개인 줄 알아?”
건기는 레이피어를 꺼내 그 가느다란 칼끝을 가리켰다.
“알이 두 개면, 하나가 없어도 남은 하나가 제 기능을 하거든.”
남성에게 가장 소중한 부위.
버키는 알이 하나 줄어든단 공포에 눈물을 흘렸다.
건기는 그의 입에서 재갈을 벗겨 다시 한 번 물었다.
“말할 생각이 들었나?”
“말할게요! 전부 말할게요!”
버키는 건기에게 전부 말해 줬다.
사실 그는 사타구니를 한 대 맞자마자, 모두 말해 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입에 물린 재갈로 인해 그 의사 결정을 전달할 수 없었다.
건기는 버키로부터 브라운 클랜의 회계사가 빼돌린 백억,
그리고 그것을 가져간 딕에 대해 알게 되었다.
“좋아, 그만 가 봐.”
건기는 약속대로 순순히 버키를 놓아주었다.
그리고 절뚝이며 도망치는 버키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딕은 분명 나중에…….”
반란.
옐로우 클랜은 둘로 쪼개지게 되고, 서로 간에 전쟁이 발발한다.
결국 보스인 교수가 승리.
하지만 그 와중에 층 몇 개가 초토화되어 엄청난 인명 피해가 발생할 것이었다.
[지력이 올랐습니다.]
기억을 떠올린 덕인가.
아님, 반대인가.
건기의 머릿속이 정의롭게 사악한 계획으로 가득 찼다.
개울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