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소금불']최근, 만점세례를 받은 '하데스'와 호평 속에 발매된 '리터널'은 하나의 공통된 키워드를 가지고 있습니다. 까다로운 재미가 특징인 로그라이크 장르는 오랜 기간을 걸쳐 여러 형태로 변주되며 많은 사랑을 누리고 있습니다. 문득 이 장르의 파생 작품들을 지켜본 필자의 머릿속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우선 본 주제와 관련된 주요 작품들을 훑어보기로 하죠.
◆로그라이크의 바이블 '토르네코의 대모험(1993)'
춘소프트(現스파이크x춘소프트)는 JRPG의 대명사인 '드래곤퀘스트' 시리즈와 사운드노벨 장르를 잉태한 전설적인 개발사입니다. 실험작 '로그'에 힌트를 얻고 RPG 개발 노하우를 바탕으로 완성된 '토르네코의 대모험'은 본격적으로 대중의 큰 인기를 얻은 로그라이크 게임이 됐습니다.
후속작으로 제작된 '풍래의 시렌'도 공전절후의 히트를 기록했습니다. 이 위대한 시리즈는 턴 기반 액션, 랜덤 타일맵, 엄격한 만복도와 자원관리, 아이템 식별, 함정 등 여러 게임요소들을 정립해 로그라이크 장르의 초석을 다졌습니다.
◆로그라이크 감성과 독창적인 세계관의 조화 '바인딩오브아이작(2011)'
북미 인디게임계의 스타이자 괴이한 세계관으로 유명한 아티스트, 애드몬드 맥밀런은 '슈퍼 미트보이'의 성공 이후 또 하나의 괴작을 탄생시켰습니다. '바인딩오브아이작'은 클래식 '젤다'의 맵 구성과 삐뚤어진 종교관이 깃든 어두운 테마를 멋지게 섞어 로그라이크 작품성의 비전을 보여줬죠.
◆찰나의 아이디어와 로그라이크의 만남 '뉴클리어 쓰론(2013)'
즉흥적으로 게임을 만들면서 창의력을 뽐내는 개발자들의 축제에서도 로그라이크는 그 진가를 발휘했습니다. 게임 개발 이벤트(Humble Bundle Mojam2)에서 3일만에 탄생한 프로토타입(Vlambeer)은 한 번 더 진화를 거듭해, 멋진 슈팅 액션게임으로 완성됐습니다.
'뉴클리어 스론'은 듀얼스틱(좌: 이동, 우: 조준)과 호쾌한 탄막 액션, 그리고 로그라이크의 미덕(랜덤맵과 자원관리)을 지키며 좋은 성과를 거뒀습니다. 또한 이 작품은 하나의 게임 스타일로 확립돼 이후 '엔터 더 건전' 등 많은 작품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유쾌한 장르 비틀기 '크립트오브네크로댄서(2015)'
박자에 따라 모든 액션이 맞춰 진행되는 이 게임 또한 로그라이크의 어여쁜 자식입니다. 장르의 선조격인 '톨네코'하고도 외관이 아주 흡사하죠. 심장 비트를 박자 삼아서 모든 행위(이동, 공격)가 이뤄지고, 보상(코인배수)을 극대화하는 재미가 백미입니다. 이 귀여운 게임의 성공은 업계의 거물, 닌텐도의 엄지척을 받으며, 인기 캐릭터인 '젤다'와의 컬래버까지 이뤄냈습니다.
◆로그라이크 역사의 위대한 순간 '하데스(2018)'
작년 게임계에서 마스터피스로 손꼽힌 '하데스'는 핵앤슬래시와 중후한 세계관이 돋보이는 게임입니다. 특히 주인공이 죽음을 겪고 다시 아버지(저승의 통치자)의 저택으로 돌아온다는 설정은 로그라이크의 핵심 룰(레벨 초기화)과 미학적으로 훌륭한 조화를 이뤘습니다. 곳곳에 네러티브가 살아 있는 연출은 이 작품을 돋보이게 하는 요소 중 하나입니다.
◆로그라이크의 DNA를 품은 검술액션 '언틸 유 폴(2019)'
VR 콘텐츠는 피로감 때문에 짧은 시간을 반복하면서 즐기는 아케이드게임의 특성을 많이 따르게 됩니다. 검 제스쳐 VR게임인 '언틸 유 폴'은 가치 있는 재도전과 긴장감을 위해, 영리하게 로그라이크의 요소를 취했습니다. 이런 준수한 게임성과 훌륭한 비주얼을 바탕으로 큰 호평을 받았죠.
한 가지 신경쓸 것이 더 있는데, 그것은 바로 참여한 게이머의 체력입니다. 여러 번 단련을 해서 체력을 길러야 안정적인 플레이가 가능하죠. 시스템으로 칼로리 체크를 하며 건강도 챙기는 효과도 누릴 수 있습니다.
◆엔드 콘텐츠 고민과 해법 '버민타이드2 카오스 웨이스트(2021)'
인기 1인칭 팀 액션게임, '버민타이드2'는 4년차 서비스를 맞이하면서 정체기에 빠진 가운데, 개발사는 고심 끝에 회심의 카드 하나를 내밀었습니다. 개발자가 손수 로그라이트 꼬리표를 붙인 '카오스 웨이스트' DLC(Chaos Wastes)가 바로 그것이죠.
하드코어한 게임성을 지향하는 개발사답게 절제된 성장 시스템(능력개방)과 여러 페널티(적 증가, 저주 등)를 배치해 게이머의 도전욕구를 자극했습니다. 특히 무기의 종류에 따라 전술이 크게 바뀌기 때문에, 모든 무기의 숙련도는 필수입니다. 그래서 이 게임의 랜덤장비 룰은 다른 로그라이크의 랜덤 아이템 시스템보다 더 높은 벽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버민타이드' 고수라면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허들이죠.
◆장르 역사의 끝에서 가장 빛난 게임 '리터널(2021)'
개발사 하우스 마퀴의 과거 작품들은 평가가 좋지만 뚜렷한 상업적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경영의 위기까지 겪었습니다. 난관에 봉착한 그들은 고집했던 작풍을 버리고, 한 번 더 소니의 지원을 받아 절실함으로 로그라이크 슈터를 빚었습니다. 그리고 '리터널'은 고득점 리뷰 세례를 받으며 당당하게 소니의 차세대 게임 라인업을 대표하는 브랜드로 거듭났죠.
기억의 파편과 코스믹 호러로 얼룩진 스테이지, 그리고 화려한 탄막 연출이 특징인 이 작품은 AAA게임의 클리셰를 타파하고, 로그라이크가 메이저 게임시장에서 당당히 성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증명했습니다. 필자가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이용자에게 차악의 선택을 강요하는 패러사이트 시스템이었습니다. 이것은 20여년 전 '풍래의 시렌'에서 만복도(생존력)를 위해 '썩은 빵'을 먹고, 능력치(힘) 감소 페널티를 감수하는 묘미와 비슷합니다.
◆오랜 역사의 비결은 영리한 중소개발사의 올바른 고집
항상 마주해야 하는 낯설고 음험한 공간, 한 자리 꿰차고 음흉한 분위기를 뿜고 있는 기괴한 괴물들, 온갖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모험자를 위태롭게 하는 악마의 함정들. 그리고 발 한 번 삐끗하면 다시 무일푼 거지로 시작해야하는 무자비한 룰까지. 이처럼 껄끄러운 요소가 잔뜩 깔려 있는 로그라이크 장르는, 대체 어떤 이유로 이처럼 오랫동안 개발자들에게 사랑받았을까요?
몸집이 작지만 민첩함과 지혜를 갖춘 도적(Rogue)은 로그라이크 개발자와 비슷한 면이 많습니다. 이들은 저예산의 한계 극복, 기발한 아이디어의 완성, 콘텐츠 생명력, 그리고 진정한 성취감을 위한 치열한 고민들을 작품에 녹였습니다. 이러한 소신을 지키는 크리에이터들 덕분에 로그라이크의 DNA는 온전히 보존될 수 있었죠.
사실 20여년 전, 이미 한 개발자가 이런 철학을 담은 발언을 한 적이 있습니다. '토르네코 아버지'에 얽힌 일화 하나를 끝으로, 이 위대한 장르에 대한 이야기도 마칠까 합니다.
P.S. 20년 전 필자에게 '토르네코'의 재미를 설파한 불의 편집자, 정태룡씨에게 감사의 말을 올립니다.
정리=이원희 기자(cleanrap@dailygam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