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ly e-sports

[홍성민의 유럽에서 게임 개발하기④] 책임과 권한은 사람이 아닌 역할에 주어진다

데일리게임이 2022년 하반기를 맞아 새롭게 준비한 '홍성민의 유럽에서 게임 개발하기'는 메카닉 액션게임 '어썰트', '레이크래쉬' 등을 개발한 개발사 코디넷 대표 출신의 홍성민 메타코어 게임즈 기술 총괄이 핀란드에서 개발자로 일하며 경험한 일과 느낀 점을 독자 여러분과 함께 나누는 코너입니다. 한국, 혹은 아시아와는 다른 유럽의 개발 문화를 간접 경험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 편집자주 >

[글=홍성민 메타코어 게임즈 기술 총괄]지난 주 헬싱키에는 올 겨울 첫 눈이 내렸습니다. 겨울과 눈의 나라로 유명한 핀란드에서 11월 말에 첫 눈이 내리는 것이 어색하다 할 수도 있습니다. 위도 37도 조금 위에 위치한 서울에 비해 60도에 위치한 헬싱키는 61도에 있는 알래스카의 앵커리지와 거의 같은 위치에 있을 정도로 북쪽 높은 곳에 있지만 따뜻한 발트해를 끼고 있는 관계로 상대적으로 덜 추운 평균 기온을 보여 줍니다.

얼어 붙을 정도의 추위는 아니지만 가을과 겨울은 일조량도 너무 짧고 구름이 잔뜩 끼어 비가 내리는 날이 계속되다 보니 11월은 죽음의 달이라는 뜻의 'Marraskuu(Marras 죽음+kuu 달)'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눈 내리기 직전의 11월은 오후 6시만 돼도 음침한 분위기가 연출 되기도 한다.
눈 내리기 직전의 11월은 오후 6시만 돼도 음침한 분위기가 연출 되기도 한다.


반대로 6월부터 9월까지의 여름은 긴 낮과 맑은 날씨, 덥지 않은 기온과 발트해의 선선한 바닷 바람으로 인해 너무나도 환상적인 날씨를 보여 줍니다. 그러다 보니 핀란드의 방학과 휴가는 여름에 집중돼 있습니다. 아이들의 방학은 5월 말에 이미 시작해서 8월 중순까지 이어지고, 7월은 관공서도 단축 근무나 휴무를 해서 비자 업무 조차도 진행이 잘 되지 않습니다. 병원도 응급 상황이 아닌 경우 예약을 하기가 쉽지 않고, 대중 교통도 시간이 모두 조정돼 배차 간격이 2~3배 이상 길어 집니다.

회사도 당연히 6월부터 7월까지는 거의 모든 업무가 중단된다고 봐도 좋을 정도입니다. 4~5주의 휴가를 쓰는 사람들로 인해 대부분의 공식적인 회의와 모임 등은 모두 취소되고, 프로젝트 일정도 왠만큼 급하지 않은 이상 특별한 계획을 잡지 않습니다. 이 기간에 한국과 일을 하는 곳이 있다면 완전한 연락 두절을 경험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깨끗한 공기와 산이 없는 지형 덕분에 지평선 너머까지 보일 듯한 핀란드의 여름은 문자 그대로 환상적이다.
깨끗한 공기와 산이 없는 지형 덕분에 지평선 너머까지 보일 듯한 핀란드의 여름은 문자 그대로 환상적이다.


여름 휴가도 길지만 병가나 무급 휴가, 아이나 가족을 돌보기 위해 쉬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런 휴무도 누군가의 허가를 받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제출하고 회사는 기록하는 형태이기 때문에 사용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습니다. 특히 병가의 경우 큰 병이 아니고 열이 나는 등의 가벼운 감기 증상이라 해도 진단서 없이 3일까지 쉴 수 있기 때문에 악용되는 경우도 분명 있기는 하지만 회사에서는 확실한 문제가 되지 않는 이상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프로젝트 일정을 짜거나 회사나 팀의 행사 등을 준비할 때에도 고려해야 할 사항이 많아지게 됩니다. 왠만한 회사의 공식 일정이라고 해도 본인이 휴가를 가서 참석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보니 확정 전에 미리 사람들과 협의를 하거나 상당한 시간 이전에 미리 공지해 사람들에게 일정을 인지시키지 않으면 서로 난처한 상황이 만들어 질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개인의 일정도 개인이 주체적으로 계획하고 책임지는 대상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각 개인에 대한 신뢰를 기반으로 조직 구성원들이 조직과 개인 모두에게 가장 이득이 되는 결정을 하고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을 훈계하거나 조정해야 하는 대상이 아닌 각자의 자리에서 공동의 목표를 향해 최선을 다 하고 있는 대상으로 보는 것입니다.

자유로운 휴가 사용은 프로젝트의 관리와 진행의 측면에서 쉽지 않은 도전을 만듭니다. 특히 일정을 계획하고 관리하는데 있어 여러 돌발 상황들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프로젝트 일정을 준비할 때는 발생할 수 있는 미래의 상황에 대해 먼저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이곳에서 프로젝트 계획을 준비할 때 가장 먼저 확인 하는 것은 정확한 비전과 그 비전에 맞는 세부적인 단계별 목표들입니다. 여기서 단계별이라는 것은 월이나 분기 같은 일정이 아니라 최종 목표 또는 어떠한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순차적인 또는 부분적인 단계들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날짜 중심의 일정을 정하지 않는 이유는 각 목표들을 완수할 시기를 처음부터 알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단계별 목표들이 준비가 되면 이 목표들을 어떻게 배치할 것인지 논의를 합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목표가 옳은지, 가능한 것인지, 그리고 충분히 명확한지도 확인합니다.

배치가 되면 이제 배정을 하게 되죠. 대부분의 경우 배정은 작업을 할 본인들이 가져가는 식으로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사람에게 일을 배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일에 연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일을 담당하게 된 사람은 그 일에 필요한 내용이 무엇일지, 얼마나 걸릴 것인지 등을 생각해 일정을 만들게 되죠.

이 과정은 아마 어디를 가나 크게 다르지는 않을 듯 합니다. 그래도 조금 다르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처음 비전과 목표를 세우는 단계부터 팀원들과 같이 논의를 한다는 것과 논리적이고 현실적인지 끊임 없이 토론한다는 점, 진행하면서 언제나 계획을 다시 돌아보고 과감하게 수정을 한다는 점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누구나 자신 있고 자연스럽게 목소리를 내고 들어줄 수 있는 분위기라는 것입니다. 지위나 역할 또는 분야와 관계 없이 궁금한 것은 질문하고, 논의돼야 할 점은 꺼내고, 아이디어를 제안하는 것이 누구에게도 부담스럽지 않은 분위기입니다. 물론 가끔은 논쟁 지점에서 "Don’t take personally(개인적으로 받아들이지 말라)"를 시도 때도 없이 시전하는 사람들때문에 심각한 번뇌의 고통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런 토론과 토의의 분위기를 만드는 것에는 워낙 많은 좋은 글들이 있고 좋은 컨설턴트들이 있습니다.

물론 시스템적으로 잘 갖추는 것이나 문화적으로 잘 준비하는 것도 중요하긴 합니다만 여기서 많이 이야기 되는 것은 사람에 대한 신뢰입니다. 아무리 시스템을 잘 준비해도 그 시스템을 적용 받고 움직이는 것도 사람이고, 문화를 만들고 발전시켜 나가고, 영향을 받는 것도 모두 사람입니다. 결국 그 사람들이 얼마나 서로를 그리고 자기 자신을 신뢰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모든 것의 시작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뢰와 관련된 한 가지 예로 핀란드의 대중교통을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핀란드에는 대중교통을 탈 때 표를 검사하지 않습니다. 물론 중간 중간 검표원이 돌아 다니기는 합니다만 정말 드문 경우이고 대부분의 경우는 검표원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표를 확인해야 들어갈 수 있는 문이나 차단기가 있지도 않습니다. 물론 버스에는 버스 카드를 대는 단말기가 있습니다만 그것도 실물 카드를 사용하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대부분은 온라인으로 표를 구매하기 때문에 단말기를 사용할 일이 없습니다. 그냥 문 열리면 타고 도착하면 내립니다.

헬싱키 지하철 입구는 아무런 차단기가 없다. 바닥에 선이 하나 그어져 있을 뿐이다.
헬싱키 지하철 입구는 아무런 차단기가 없다. 바닥에 선이 하나 그어져 있을 뿐이다.
Leppävaara역은 버스 승하차장과 기차 플랫폼이 붙어 있으며, 역시 기차 플랫폼에 아무런 차단기가 없다. 표지판 왼쪽의 도로가 버스 승하차장이고 오른쪽이 기차 타는 플랫폼이다.
Leppävaara역은 버스 승하차장과 기차 플랫폼이 붙어 있으며, 역시 기차 플랫폼에 아무런 차단기가 없다. 표지판 왼쪽의 도로가 버스 승하차장이고 오른쪽이 기차 타는 플랫폼이다.


제가 여기서 느끼는 신뢰라는 것은 단순히 누군가의 말을 믿을 수 있다, 거짓말이 아니다를 넘어 그 사람의 행동과 사고방식 그리고 사상과 철학에 대한 신뢰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나와 다른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있고, 나와 역할이 다르고 분야가 다르더라도 의견과 아이디어는 모두 가치있다는 믿음과 그 모든 이야기들은 공동의 목표를 위해 같이 노력하고 있다는 신뢰입니다.

우리는 조직 내에서 책임과 권한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그러면서 권한의 위임이나 책임의 범위에 대한 이야기도 하고, 그것이 누구에게 주어지는 것인지 관심있게 봅니다. 하지만 이렇게 책임과 권한이 특정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주어지면 결국은 권력화가 생기게 되고, 그 사람이 정말 특출나게 뛰어나지 않을 경우 누군가는 불만을 가질 수 밖에 없으며, 그 한 명을 위해 완벽하게 목숨걸고 충성하지는 조직이 아닌 이상 모든 구성원들이 최선을 다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겁니다. 그러면 조직에서는 개인들의 성과를 높이기 위해 다시 관리 체계를 만들어 내고 미래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구성원들은 더욱 수동적이 될 위험이 있습니다. 단기적인 성과는 보이겠지만 장기적으로는 그 어느 누구도 행복하고 지속적인 성장을 이뤄내는 것이 쉽지 않게 됩니다.

21세기의 새로운 사회는 20세기의 구조적이고 수직적인 책임의 피라미드를 거부하는 세대들의 세상입니다. 특히 게임 개발은 개인의 역량이 결집되고 최고의 효율을 낼 수 있어야 결과를 만들 수 있는 시대가 됐습니다.

팀워크는 누군가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같은 목표를 보고 같은 방법으로 노력할 때 쌓아 올려 지는 것입니다. 팀을 위한 규칙과 규범은 틀을 만들거나 제한을 두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안전하고 편안하게 그리고 최고의 성과를 만들 수 있는 방향성과 길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책임과 권한은 사람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역할에 주어져야 하며 상황과 필요에 따라 그 역할은 그 순간 가장 적합한 사람이 맡아야 합니다.

이것이 제가 북유럽에서 배운 역할과 책임입니다.

정리=이원희 기자 (cleanrap@dailygame.co.kr)

<Copyright ⓒ Dailygame co, Lt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데일리랭킹